[인터뷰] 다큐 ‘김일성의 아이들’ 극영화로 만든다…“감춰진 역사 널리 알려졌으면”

김덕영 영화감독

이윤정
2022년 07월 9일 오후 2:15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3

김일성 우상화에 희생된 1만 명 전쟁고아 재조명
극영화 ‘두 개의 고향’…유럽과 합작 영화 기대
이승만 다룬 ‘하와이로 간 대통령’ 다큐도 제작 중

1950년대 5천 명가량의 북한 아이들이 동유럽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왜 북한 아이들이 유럽 땅에 와서 살아야 했을까? 우리는 70년 전 그들이 남긴 행적을 찾아 여행을 시작했다.

귓전을 울리는 애잔한 해금 선율을 타고 ‘고향의 봄’ 노래가 흐르면서 김덕영 감독의 내레이션이 시작됐다.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첫 장면이다.

‘김일성의 아이들’은 1950년대 북한 김일성 주석이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됐던 전쟁고아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김덕영 감독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록을 찾아 동유럽 곳곳을 취재했다. 장장 15년에 걸친 추적이었고, 자비 2억 원을 쏟아부었다. 북한의 폐쇄성으로 인해 영원히 묻힐 뻔했던 북한 전쟁고아들의 이야기는 김 감독을 만나 그렇게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왔다.

영화는 2020년 6·25 전쟁 70주년에 맞춰 국내에서 개봉된 후 미국 ‘뉴욕국제영화제’와 프랑스 ‘니스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했고 이탈리아 ‘로마국제무비어워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작품상, 동유럽국제영화제 은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김일성의 아이들’은 현재 ‘두 개의 고향’이라는 제목의 극영화로 제작하기 위한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상태다. 7월 6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김덕영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20년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로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김덕영 감독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김일성의 아이들’을 연출하게 된 계기를 묻자 김 감독이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2004년, 대학 선배인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북한인 남편을 40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KBS 시사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던 김 감독은 곧바로 루마니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파란 눈의 할머니 사연은 그해 6월 ‘수요기획-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로 방송됐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 사는 할머니의 이름은 제오르제타 미르초유. 6·25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대 초반 갓 스무 살을 넘긴 미르초유는 당시 루마니아로 보내진 북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그녀는 북한 고아 3천여 명을 이끌고 루마니아로 온 조선인민학교 교장 조정호 씨와 사랑에 빠졌다. 4년간의 비밀 연애 끝에 두 사람은 양국의 승인을 받고 1957년 결혼했다. 기쁨도 잠시, 1959년 미르초유는 북한으로 송환된 남편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딸까지 낳았지만, 남편은 곧바로 탄광으로 보내졌고 졸지에 생이별한 부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 조미란 씨는 어느덧 중년이 됐다.

조정호, 미르초유, 그리고 딸 미란, 1962년 평양에서 찍은 그들의 마지막 가족사진. 김 감독은 “사진이 실제로 찢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극영화 제작을 위한 상상력의 모태가 됐다”고 설명했다. | 김덕영 감독 제공

“처음엔 북한 남자와 루마니아 여성의 러브스토리라는 특이한 소재에 끌렸다. 그런데 사연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전쟁고아들이 동유럽에 보내졌던 사실과 김일성 우상화 과정, 북한이 폐쇄적 체제로 변질되는 과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6·25 전쟁으로 10만여 명의 전쟁고아가 발생했지만, 남북한 모두 자력으로 고아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남한은 고아들을 미국, 유럽 등에 입양 보냈고 북한은 전쟁고아들을 ‘위탁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체코 등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명령으로 당시 동유럽 각국에는 북한 전쟁고아들을 위한 ‘조선인민학교’가 설치됐다.

외교부 문서 등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동유럽에 머물렀던 북한 고아들은 최소 5000명 이상이다. 김 감독은 실제론 1만 명은 됐을 거로 추정했다.

“두 가지가 흥미로웠다. 아이들이 유럽 곳곳에 흩어져 생활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문이 들었고, 북한 체제의 폐쇄성과 김일성 정권의 실체가 이 속에 들어있다 싶었다.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70여 년 전 북한 전쟁고아들의 행적을 찾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야말로 숨겨진 기록과의 싸움이었다. 동유럽 5개국을 수도 없이 답사하며 각국 기록보관소와 국립 도서관,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사진 100여 장, 전쟁고아들이 북한으로 돌아간 뒤 유럽으로 보낸 80여 통의 편지, 학교에 남아있는 고아들의 학적부, 그들의 일상이 담긴 기록 필름 등을 발굴했다. 수소문 끝에 북한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던 12명의 생존자를 찾아냈고 모두 인터뷰했다.”

“루마니아 기록보관소에서 극적으로 4분 30초 분량의 35mm 기록 필름 하나를 발견했다. 하얀 장갑을 낀 직원이 들고나온 먼지투성이 필름 통은 70년 세월을 말해주듯 새카맣게 녹슬어 있었다. 영상을 틀자 당시 학교·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북한 전쟁고아들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튀어나왔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미르초유가 눈물을 글썽이며 스크린 속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이 역사가 사실이구나 느꼈고 계속 파고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취재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김덕영 감독이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제작을 위해 불가리아 북한 전쟁고아 동창생 베셀린 콜레브 씨를 인터뷰하는 모습 | 김덕영 감독 제공

“불가리아에서 북한 전쟁고아들과 같이 학교에서 공부했던 동창생 7명을 만난 적이 있다. 전쟁과 북한 친구들 얘기로 인터뷰를 하던 중 갑자기 한 할아버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할머니들도 따라 부르면서 합창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60년 전 북한 아이들을 만났던 것 외에는 불가리아 시골 마을에서 한국과 교류 없이 살아온 노인들이 한국말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다니. 북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불렀으면 백발노인이 된 불가리아 친구들이 지금까지도 기억할까. 소름이 돋았다.”

영화에는 1953년 루마니아의 조선인민학교에서 매일 아침 6시 30분이면 일어나 김일성 초상화가 그려진 인공기에 경례하고 김일성 찬가를 제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 감독은 “동유럽 5개 국가의 인터뷰이들이 모두 공통으로 증언한 ‘아침조회 시간’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루마니아에서 발견된 기록 필름에는 북한 전쟁고아들의 아침조회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인공기에 경례하는 북한 아이들(좌), 김일성 얼굴이 새겨진 인공기(우) | 김덕영 감독 제공

김 감독은 “아이들이 북한 교사로부터 받았던 교육 특히 김일성 주의·주체사상 교육의 강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며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맹아적 형태로서의 집단주의적 주체사상 교육이 강도 높게 이뤄졌을 것”이라고 유추했다.

“그 어떤 공산주의 국가, 독재국가에서도 살아 있는 인물을 국기에 새겨 넣는 건 본 적이 없다. 북한 주체사상의 시작이 통상 1960년대 초부터 작동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950년대 동유럽으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들에게 이미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북한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폐쇄적 체제를 유지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이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유럽 생활에 잘 적응했을까.

“시간이 갈수록 유럽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유럽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엄격한 사상교육과 자유로운 분위기 사이에서 심리적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둔천이라는 아이의 사망 소식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어떤 아이였나?

“폴란드 선생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12살이던 원둔천은 매우 총명한 아이였다. 북한식 교육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원둔천은 평소 질문도 많았고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자주 담을 넘어 학교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아이들이 동요될까 우려한 북한 당국이 원둔천을 정신 질환이 있는 아이들 속에 포함시켜 북한으로 돌려보낸 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원둔천은 중국 국경을 넘어 폴란드까지 걸어가겠다고 하다가 늪에 빠져 사망했다. 나중에 아이들이 북한으로 송환된 후 유럽으로 보낸 편지를 통해 알려진 이 사실은 폴란드 현지인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북한 아이들이 유럽에 보냈던 편지들은 동유럽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움과 함께 유럽으로 날아들던 편지는 오래되지 않아 끊어졌다. 북한 당국은 ‘먹을 게 없다’ ‘연필이 부족하다’ 등 북한 내부의 부정적 사정이 외부에 알려지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아이들은 유럽에서 얼마나 머물렀나.

“길어야 8년 정도다. 북한은 1956년부터 동유럽 각국 고아들을 강제 귀국시키기 시작했다. 그해 김일성이 동유럽을 방문하는 동안 김일성 절대권력에 도전한 ‘8월 종파 사건’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동유럽에 머물던 북한 유학생과 고아들이 헝가리 혁명에 가담하면서 김일성은 동유럽 각국의 고아들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했고 북한 아이들은 어느 한순간 마치 연기처럼 모두 사라졌다.”

북한에서 김일성주의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반(反) 김일성 세력에 의한 정치 쿠데타를 직접 경험한 김일성은 동유럽에 살면서 자유화 바람을 경험한 아이들을 자신의 체제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로 봤다.

“북한은 국가 경제나 사회 발전을 위해 1만 명가량의 이 선진 엘리트들을 활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유럽의 자유로운 문물에 익숙해진 수천 명의 고아가 북한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한 김일성은 아이들을 전국에 뿔뿔이 흩어놨고 철저하게 숨겨버렸다.”

-체코의 시골 마을 발레치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두 개의 이름이 인상적이었다.

북한 아이들 이름이 새겨진 체코 발레치 오벨리스크. 림기종, 변철호, 1956년이라는 글자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 김덕영 감독 제공

“아이들이 체코를 얼마나 떠나고 싶지 않으면 2m가 넘는 석탑에 힘겹게 기어 올라가 그 단단한 화강암 돌의 표면을 깎아 자기 이름 석 자를 새겼겠나. 그 절박한 심정은 보통 사람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역사가 70년 동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공산주의는 원래 체제에 유리한 사건은 침소봉대하지만 불리한 건 철저히 숨긴다. 한국전쟁 이후 해외 여러 나라들이 북한을 돕기 위해 지원에 나선 일은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북한 전쟁고아들이 유럽 각국에서 철저하게 비밀리에 생활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로선 동유럽에 머물던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역사는 외부에 알려지지 말아야 했다.”

-영화 제작을 통해 얻은 수확이 있다면.

“전쟁의 상처 속에서 피어난 사랑, 우정, 순수한 휴머니즘에 대한 기록이자 북한 체제의 모순과 속성을 발견한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은 경제적으로 좀 낙후된 데다 그들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여서 한창 전쟁 복구를 해야 했던 시기다. 자기 나라 아이들 보살필 시설과 재원도 모자라는 형편에 생면부지의 북한 아이들을 수백, 수천 명씩 받아준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북한 아이들이 언제 돌아갈 거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동유럽 사람들은 이 아이들이 그냥 가족처럼 평생 같이 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불가리아 상황은 더 낙후해서 처음엔 북한 아이들을 못 받겠다고 했다가 소련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수용했다. 당시 공산주의 배급제였는데 당에서 제공한 쿠폰을 북한 아이들과 절반씩 나눠 쓴 셈이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북한 아이들은 교사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렀다. 김 감독이 극영화 ‘두 개의 고향’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준 사진 중 하나다. | 김덕영 감독 제공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북한 아이들은 교사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렀다. 김 감독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예상치 못했던 따뜻한 인간애를 발견할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며 “우리가 꼭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순수한 휴머니즘을 보여준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북한에 대해 알게 된 점은?

“북한 체제가 가진 모순성과 역사성을 이해하고 김일성 정권의 본질에 접근하게 된 과정이었다. 북한은 곧 망할 것이라는 숱한 진단과 달리 북한 체제와 김일성 주의, 주체사상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강고하게 유지되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궁금증이 있었다.”

“1만 명의 전쟁고아가 김일성 단 한 명을 위해 희생된 것처럼 2500만 명 북한 주민들은 1%도 안 되는 김일성주의자들에 의해 노예처럼 살고 있다. 김일성주의가 변하지 않는 한 북한 체제, 북한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 질문에 김 감독은 “단순히 경제 교육 몇 번, 스포츠 교류 몇 번 하고 한반도기 같이 든다고 북한이 변화할 것인가”라고 반문한 뒤 “지극히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대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북한 체제는 과거 동유럽 공산주의 나라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체제다. 김일성 주체사상이 70년에 걸쳐 3대째 이어져 온 북한 사회의 본질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통일도 가능하다.”

영화 속에는 여전히 남편을 그리워하며 “마치 나를 자기 아이처럼 사랑해줬다”고 눈물을 흘리는 미르초유 할머니의 모습도 담겼다. 우리나라 남북 이산가족 문제가 떠올랐다. 그녀는 루마니아어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남편을 위해 16만 개 단어를 담은 루마니아어-한국어 사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미르초유는 루마니아어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남편을 위해 16만 개 단어를 담은 루마니아어-한국어 사전을 출간했다. | 김덕영 감독 제공

-‘김일성의 아이들’을 극영화로 제작하게 된 동기는?

“너무 소중한 역사라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2년 전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 당시 방해받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 당시 정부가 남북교류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김 감독의 설명이다. 아울러 “국내 34개의 독립영화 전용관에서 이 영화를 상영해주지 않았다”며 “독립영화 전용관은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인데 상영 스케줄이 꽉 차서 쓸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며 외압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김 감독에 따르면 극 영화로 제작될 ‘두 개의 고향’은 폴란드 여교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러브스토리를 축으로 구성된다. 원작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좀 더 재밌게 각색했다.

현재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애플 TV 등에 문을 두드린 상태다. 최근 ‘파친코’를 제작하며 한국 역사 드라마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애플 TV를 통해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바람에서다. 김 감독은 “폴란드·체코·헝가리에서 로케이션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가능하면 3국이 합작해도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덕영 감독은 지난해 자유와 인권을 주제로 한 리버티국제영화제도 출범시켰다. 흔치 않은 영역에 도전을 거듭하는 김 감독에게 동력이 뭔지를 묻자 “애국심”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내년 1월 개봉한다는 다큐멘터리 ‘하와이로 간 대통령’은 어떤 영화인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거짓이 존재해 왔다는 게 무척 안타깝다. 수사기록물, 국회 속기록 등 원전에 근거해 왜곡된 부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거로 본다. 이 영화는 역사적으로 왜곡된 것들에 대해 그동안 왜 반론조차 제기하지 않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될 것이다. 나 자신에게도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심정으로 나라의 독립을 지켰는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무엇을 꿈꿨는지 되돌아볼 기회가 될 것 같다.”

-작년엔 자유·인권을 내세운 리버티국제영화제도 출범했다. 흔치 않은 영역에 대한 도전,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추구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가?

“애국심. 그냥 나라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한국 사회가 겉으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위상도 많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자유민주 체제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봤을 때 굉장히 불안한 시기다.”

“내 행동의 판단 기준은 내 아이들, 후배들한테 어떤 사회를 물려줘야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이다. 올바르고 가치 있는 것에 목숨 걸고 사는 것만큼 의미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김덕영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1995년 영화 ‘저물어가는 1989년’을 만들면서 영화감독의 삶을 시작했다. 1999년 ‘Farewell to the factory’는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공식 경쟁 부문에 선정됐고 일본 NHK에 방송돼 화제를 모았다. 2020년 ‘김일성의 아이들’로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1년 자유·인권을 주제로 한 ‘리버티국제영화제’를 출범시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오는 11월, 2회를 맞는 리버티국제영화제는 시민들이 1~2만 원씩 낸 소액 성금으로 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참여형’ 국제영화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