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 부자가 요절한 이유는 ‘인과응보’ 때문?

중국 전통문화 선양대회 출품작

2019년 05월 19일 오후 8:28 업데이트: 2019년 12월 5일 오후 4:25

옛 서적에 인과응보에 관한 실화가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이 관점에서 이소룡 부자가 요절한 비밀을 파헤쳐 본다.

많은 사람이 이소룡이 중국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 말하자면 재미 화교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최초의 화교 배우였다. 그가 주연한 쿵푸영화 <당산대형(唐山大兄)>이 큰 호평을 받았고, 이어서 출연한 <정무문(精武門)>, <맹룡과강(猛龍過江)>, <용쟁호투(龍爭虎鬪)>및 <사망유희(死亡游戱)>가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그는 곧바로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소룡은 대만 금마장 최고연기자상, 홍콩 금상장, 영국 영화제작자협회의 전설대상(传奇大奖)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67년에는 스스로 절권도를 만들어 중국 전통무술 쿵푸를 널리 알렸으며, 미국 <블랙벨트>잡지에서 선정한 20세기 10대 무술가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 복싱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이소룡은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나는 정말로 그의 무술을 좋아하며 그를 만나고 싶다. 그는 그의 시대를 초월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미국 유도의 대부로 불리는 제니 레벨은 “그의 공격 속도는 일반인보다 두 배는 빠르고 권법과 보법 및 발기술도 뛰어나다. 만약 무술가에 왕이 있다면 소룡은 왕 중의 왕으로,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정상급 고수다”라고 평가했다.

이소룡은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에게도 부르스 리란 이름으로 아주 익숙하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한마디로 당대 쿵푸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의 영화는 전 세계 화인들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고, 그의 이름은 무술영화 내지는 중국 쿵푸의 상징이 됐다.

요절한 이소룡 부자(父子)

하지만 이소룡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33세에 영화 <사망유희>를 촬영하던 중 홍콩 구룡의 집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1973년 7월 20일이었다. 이 사건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피살당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병으로 죽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약물 부작용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복상사’했다고 한다.

한편 이소룡의 아들인 브랜던 리(李國豪, Brandon Lee, 1965년 2월 1일~1993년 4월 1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8세 때 아버지 이소룡이 사망했다.

브랜던 리는 부친으로부터 재능과 끼를 물려받았고, 그의 모친 역시 무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브랜던 리는 어렸을 때부터 모친에게 무술교육을 받았으며, 성년이 되자 그의 무술 실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나중에 보스턴 에멀슨 영화학교에 진학해 영화와 연출을 전공했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배우가 됐고 TV영화 <쿵푸영화(功夫圈 Kung Fu: The Movie)>에서 이소룡의 대역으로 데뷔했다.

브랜던 리는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소룡의 공백을 메꿔줄 인물로 평가받는 등 전도가 유망했다. 특히 1400만 달러가 투자된 영화 ‘크로우(The Crow)’에서 그는 감독의 요구에 따라 고난도 동작들을 직접 연기했다.

하지만 한창 영화를 촬영 중이던 1993년 4월 1일 밤 12시 30분 총성 1발이 울렸고, 복부 관통상을 입은 브랜던은 출혈 과다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다.

그의 죽음은 부친 이소룡의 비극을 재연한 것으로, 한창 떠오르던 쿵푸 스타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이소룡 부자는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었을까? 우선 이소룡의 부친 이야기부터 해보자.

인질을 납치해 살해한 이소룡의 부친 이해천

많은 이가 이소룡 가문의 고향을 광둥성 순더(順德)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난하이(南海)다. 부친 이해천(李海泉)은 원래 고향이 난하이 쥬장이었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순더로 도망가서 정착했기에 오해가 생겼다.

이해천은 본래 악질 토호로, 사람을 납치해 돈을 갈취했다. 한번은 어느 부잣집의 다섯 자녀를 납치해 거액을 요구했다. 부잣집에서는 돈을 융통해 겨우 큰아들은 찾아올 수 있었지만, 나머지 4자녀를 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해찬은 이들 4자녀를 전부 살해했다. 그는 나중에 살아남은 큰아들이 복수할까 봐 순더로 도피했다.

이해천의 납치 살인극은 이 한 건에 그치지 않았다. 난하이 쥬장 둔건(敦根)촌에 살았던 이진(李珍) 여사의 공개 증언에 따르면 이해천은 겨우 4살 난 자신의 남동생도 납치해 살해했다.

2차 대전 기간에 일본이 중국 땅 절반을 점령했다. 이해천은 이 시기 광둥에서 홍콩으로 도피했다. 나중에 일본군이 홍콩을 공격하자 당황한 이해천은 머나먼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것이 이소룡이 중국계 미국인이 된 연유다.

나중에 이해천은 또 홍콩으로 돌아와 성공했다. 1948년에는 월극사대명축생(粵劇四大名醜生‧축생은 중국 전통극에서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전문으로 하는 배우를 지칭)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인과응보의 법칙

전통문화에서는 인과응보를 강조하는데 ‘조상이 덕을 쌓고 덕을 잃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나쁜 짓을 해서 덕을 잃고 업력을 쌓으면 그로 인해 그 사람 당대 또는 윤회전생한 후 재난이나 질병 등의 화를 입게 된다. 또 조상이 쌓은 업력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끼쳐 후손이 재난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중국에는 인과응보와 관련한 고사성어가 유난히 많다. 예를 들면 ‘자업자득’, ‘자기가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선에는 선한 보응이 있고 악에는 악한 응보가 있다’, ‘인과응보’, ‘응보에는 착오가 없다’ 등등이다.

어떤 사람은 이소룡이 빠른 몸동작과 가혹한 고강도 훈련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력을 너무 빨리 소진한 것이 요절한 원인이라고 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소룡은 10대 시절 엽문(葉問)을 스승으로 모시고 영춘권을 배웠다. 엽문은 그의 걸음걸이를 보고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다. 이소룡은 줄곧 걸음걸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고, 미국에서 홍콩에 돌아온 후 엽문에게 지금은 발뒷꿈치로 땅을 밟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소룡은 1960년대에 미국에서 절권도를 창립한 후 고강도 훈련을 했다. 따라서 이것이 그가 단명한 원인이 아니다.

사실 영춘권의 훈련 강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춘권을 ‘여자권’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소룡이 10대 때 엽문이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봐 가혹한 훈련이 그가 단명한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인과응보가 모든 것을 주도했다고 봐야 한다.

이소룡이 요절한 후 그의 사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면 아들 브랜던 리가 총기사고로 요절한 것 역시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우연의 일치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이소룡 부자는 젊고 건강했으며 본래 아픈 곳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불행한 일이 나타났으니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은 확실히 낮다.

전통문화에서는 도덕과 선을 행하고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을 중시한다. 하지만 중국 정권은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훼멸하려고 전통문화를 파괴해 선악에는 보응이 따름을 믿지 않게 했다. 그 대신 무신론을 강요해 사람이 천지와 투쟁하고 사람마다 적이 돼 투쟁해야 한다는 사악한 이론을 주입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이란 단지 살덩어리에 불과해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따라서 멋대로 행동하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 이렇게 한 목적은 사람을 죄악의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 도덕을 파괴하기 위함이다.

인과법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천리다. 이는 사람의 주관적인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해서 작용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옛말에 “지금까지 하늘의 운기는 늘 순환해왔고 응보는 선과 악 사이를 분명히 밝혀준다”고 했다. 이는 모든 일에 인과가 있으며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보고 있다는 뜻이다. 자고로 인과응보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다. 다만 빨리 오고 늦게 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천리의 엄중함에 비추어 볼 때, 이해천이 사람을 죽인 재앙이 후손에게 미쳐 이소룡 부자가 요절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오늘날 중국 대륙을 생각해보면, 지극히 엄중한 천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은 대대적으로 양심을 팔고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한다. 더구나 산 사람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해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으니 장차 어떤 후과가 닥칠 것인가? 당자자들은 물론이고 그 자손들까지 얼마나 큰 재앙에 휩싸일 것인가! 가히 모골이 송연하지 않은가?

수많은 사례가 설명하다시피, 사람들에게 온갖 악행을 사주하는 중국 정권에서 멀리 벗어나고 삼퇴(공산당 3대조직에서 탈퇴함)를 해야만 재난을 피할 수 있다. 진상을 알고 시비를 바로 가려 선한 마음으로 천리에 순응해야만 자신과 후손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남겨줄 수 있다.

참고자료:

엽문(葉問)의 유명한 제자 ‘곽부(郭富)’ 인터뷰 영상.

이소룡 부친은 납치에 가담했을까? 구순 할머니가 폭로하는 이해천의 과거.
남방망(南方網) 2003-12-03(http://news.southcn.com/dishi/foshan/shehui/20031203043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