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주한 중국대사 列傳③] ‘전랑외교의 전범’ 우다웨이 2대 대사

최창근
2021년 08월 10일 오후 5:28 업데이트: 2024년 01월 20일 오후 10:52

직설 화법으로 잦은 구설수, 내정 간섭 수준 발언 서슴지 않아
駐日 공사 역임한 ‘일본통’, 한국대사 이임 후 일본대사로
외교관 퇴임 후 한반도사무특별대표로 한반도 문제 관여

“나는 말갈족(靺鞨族) 출신이라 말을 돌려서 못하고 직설적으로 하는 것이 외교관으로서 흠이다” 이 발언의 당사자는 우다웨이(武大偉)이다. 그는 만 6년 재임한 장팅옌(張庭延) 초대 대사를 이어 1998년 제2대 주한국 중국대사로 부임했다.

공식 기록상 ‘한족(漢族)’이지만 스스로 말갈족의 후예라 밝힌 우다웨이는 1946년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룬(海倫)에서 태어났다. 중국 동북 3성의 하나인 헤이룽장성 일대는 말갈족의 한 갈래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옛 터전이다. 흑수말갈은 요(遼)나라를 세운 거란족에 의하여 1116년 발해가 멸망한 후 여진족(女眞族)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 금(金)과 청(淸)을 건국했다.

일본통 외교관, 서기관·참사관·공사 거쳐 주일 대사 역임

우다웨이는 베이징외국어대학 일본어학과에 입학하여 ‘일본’과 본격 인연을 맺게 됐다. 그 무렵 중-일 관계에 근본 변화가 일었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가 중국을 방문, 중-일 국교가 정상화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국교 수립 이듬해인 1973년 우다웨이는 주일본 중국대사관 근무를 시작으로 직업 외교관 길로 들어섰다. 1979년 본국으로 귀임하여 외교부 아주사(亞洲司)에 근무했고 1980~85년 국무원 판공청 부처장(과장보좌) 직급으로 일본 업무를 담당했다. 1985년 다시 주일본대사관에 부임하여 2등 서기관, 1등 서기관으로 일하며 훗날 외교부장과 외교담당 국무위원으로 영전하는 탕자쉬안(唐家璇) 공사를 보좌하며 탕자쉬안의 신임을 얻었다. 탕자쉬안은 1991년 외교부 부장조리(部長助理·차관보 해당)를 거쳐 1993년 부부장, 1998년 부장으로 승진했다. 탕자쉬안의 신임 하에 우다웨이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89년 외교부 아주사 일본처 처장, 참찬(參贊·참사관)을 거쳐 1992년 아주사 부사장(副司長·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94년 주일본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했고 공사로 승진하여 1998년까지 근무하다 2대 한국 대사로 부임했다.

주한국 대사 부임 후부터 우다웨이는 각종 현안에 대해 중국 입장을 강하게 대변했다. 1999년 9월 2일, 한국언론재단 주최 초청 강연에서 “탈북자 문제는 중국과 북한 사이에 발생하는 것으로, 북-중이 적절한 처리능력을 갖고 있다” “탈북자는 난민이 아니며, 탈북자 문제는 중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로서 이를 거론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중국이 법률에 따라 이들을 북한에 돌려보내는 것은 당연한 조처이며 한-중 정부 간에 문제를 논의할 어떠한 계획도 없다” “탈북자는 북한 내부에서 정치적 제한을 받지 않고 있으며, 유엔고등판무관(UNHCR)실도 이들이 난민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북한에 돌아간 후에도 신변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발언했다.

탈북자 문제는 中 내정문제, 달라이 라마는 돈 때문에 방한하려 해

그해 11월, 탈북 주민 7명이 러시아 국경을 넘다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붙잡혀 12월 30일 중국으로 인계됐다. 2000년 1월 12일 중국 정부는 이들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은 이들이 한국행을 원하는 난민으로 판정했으나 러시아 정부가 난민판정을 거부한 채 중국에 송환했고 중국은 다시 북한에 넘긴 것이었다. 1월 13일 우다웨이는 홍순영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을 방문, “중국 정부가 탈북자 7명을 심문한 결과 이들이 단순한 경제적 이유에서 밀입국하였음을 확인했다” “중-북한 국경협정에 따라 북한 측에 송환하게 됐다”고 통보했다. 우다웨이의 통보 후 홍순영 장관은 청와대로부터 경질 통보를 받았다. 탈북자 처리 문제가 주원인이었다.

우대웨이 전 주한 중국대사. 중국 외교부 부부장 시절. 뒤에 보이는 인물은 싱하이밍 현 주한 중국대사다. | 연합뉴스

우다웨이의 강경 발언은 이어졌다. 2000년 9월 8일, 국회 아시아·태평양정책연구회 초청 강연에서 당시 문제시되던 중국산 납 꽃게 파문 관련해서 “현재 납 꽃게 사건을 중국인이 한 것으로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중국 수산물의 품질을 떨어뜨리기 위한 소행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더하여 “문제의 (중국 수출) 회사가 미국과 일본에도 꽃게를 수출하고 있지만 거기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데 왜 한국 시장에서만 그런 납이 나오느냐”고 반문했다.

티베트 정교(政敎) 지도자 달라이 라마 방한 관련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우다웨이는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달라이 라마가 한국에 오면 한-중간 단교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양국 간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발언했다. 이를 두고 주재국 대사가 ‘단교’를 언급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발언 당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차관은 우다웨이 대사를 정부중앙청사로 불러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전 종교계가 관심을 갖는 사안이고 정부로서는 이 같은 국민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납 꽃게 사건은 진상을 철저히 밝혀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며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했다.

이후에도 우다웨이는 내정 간섭성 발언을 지속했다. 2000년 11월 16일, 한국언론재단 주최 ‘남북 정상회담 이후의 한-중 관계’ 조찬 강연회에서 그는 “달라이 라마는 원래 중국 칭하이(靑海)성에서 태어나 티베트 불교의 생불(生佛)로 활동했으나 1959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인도로 간 이후 중국의 분열과 티베트 독립을 책동하는 단 한 가지 일만 했다. 지난날 중국은 이 문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이제는 미국 사람들이 저지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이 중국의 입장을 지지해줘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라는 외투를 쓴 채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고 개인적 영향력 확대를 모색하는 외에 10여 억원의 활동경비 모금을 위해 방한하려 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에게 1989년 노벨상을 수여한 것은 노벨평화상에 대한 우롱이다”며 달라이 라마와 미국 정부를 비난했다. 1992년 한-중 수교와 동시에 이뤄진 한-대만 단교 후, 한-대만 간 정기 항공 노선 복항(復航) 협상 관련해서는 “양 지역 간 문제지만 국가 주권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중국과 사전 협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간차원에서의 교류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며 중국 정부의 ‘사실상 사전 승인’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한국 언론, 우다웨이는 ‘방약무인’ 비판

이를 두고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하여 “우다웨이가 적절한 자제심과 겸양의 덕을 갖춘 외교관인지 다시 한번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매일신문’ 사설도 “남북관계 개선에 중국의 역할이 크다고 하더라도 마치 과거의 청국 칙사처럼 방약무인한 우다웨이의 언행을 어디까지나 인내할 것인지 정부의 대응방안이 기대된다”며 우다웨이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촉구했다. 결과적으로 2001년 7월 예정된 달라이 라마 방한은 외교통상부의 ‘입국 불허’로 무산됐다.

우다웨이의 대사 재임 중 한-중 양국이 충돌한 대표적 사건은 ‘중국산 마늘 파동’이다. 한-중 수교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양국 간 통상 분쟁이었다. 1999년 9월 30일, 한국 농협중앙회가 신청한 무역구제조치가 발단이었다. 당시 중국산 마늘 수입이 늘며 농가 피해가 커지자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는 ‘고율 관세 부과를 골자로 한 잠정적 수입제한(temporary safeguard)’을 건의했다.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는 건의를 수용해 2000년 6월 4일까지 200일간 중국산 마늘에 대해 긴급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측도 즉각 보복 조치를 취했다. 한국산 휴대전화, 폴리에틸렌 전면 수입금지 선언을 발표했다. ‘방법’ 면에서도 보복 관세 부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금수조치를 취했다. 두 상품 교역액은 중국산 마늘수입액에 비해 50배 이상 많았다. 이 과정에서도 우다웨이는 중국 측의 입장을 대변하여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2001년 7월, 우다웨이는 한국 대사직을 이임하고 주일본 대사로 전임됐다. 부임 2년 10개월 만이었다. 당시 그의 이임을 두고 한국 언론들은 “돌출성 문제 발언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외교관으로 기록될 것이다”고 보도했다.

駐日대사 거쳐 외교부 부부장, 한반도사무특별대표로 장수

주일본 대사 부임 후, 우다웨이는 2004년 외교부 부부장(아시아·조약법규담당)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재임했다. 후임 대사는 왕이(王毅) 현 외교부장이다. 2010년 ‘정년’을 맞이한 우다웨이는 외교부 부부장직에서 면직됐다. 대신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政治協商會議·정협) 상무위원 겸 외사위원회 부주임 위원으로 임명됐다. 동시에 ‘중국 정부 조선반도 사무 특별대표’가 돼 북핵 6자회담 중국 측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한반도사무특별대표로서 우다웨이는 중국의 ‘국익’ 우선 행보를 이어 나갔다. 박근혜 정부 시절 첨예한 한-중 갈등을 야기한 ‘종말고고도지역방어체계(THAAD·사드)’ 관련해서 2017년 3월, 우다웨이는 홍콩 봉황위성TV 인터뷰에서 “우리는 미국과 한국이 사드 배치를 중단해 한반도 문제에 새로운 곤란을 만들지 않기를 촉구한다” “만일 미국과 한국이 이를 고집한다면 중국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 “우리는 여전히 한국 정부와 사드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을 바라며, 차기 한국 정부가 사드 문제 관련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경고했다. 한국 대선을 앞둔 4월 방한하여 각 대선캠프를 방문하여 “사드 시스템은 한국 것이 아니라 미국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중국 측은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7년 8월, 만 70세가 된 우다웨이는 한반도사무특별대표직을 조선족 출신 쿵쉬안유(孔鉉佑·공현우) 부장조리(차관보)에게 넘기고 은퇴했다.

/최창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