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 김용이 쓴 무협소설에 담긴 의미

밍후이왕
2020년 09월 3일 오전 12:37 업데이트: 2020년 09월 3일 오후 6:51

많은 사람이 김용(金庸)의 무협소설에 빠졌지만 당신은 소설 속에 현대 정치에 관한 풍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김용은 ‘녹정기(鹿鼎記)’ 중의 신룡교(神龍敎)는 공산당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훗날 몇 부의 그의 작품에는 확실히 문화대혁명에 대한 일부 함의가 있다.

‘녹정기’ 중의 신룡교는 명말청초 시기에 강호에 있던 사이비 종교다. 목적은 강호를 통일하고 천하를 제패하려는 데 있다. 김용이 ‘녹정기’를 쓴 것은 1969년으로 문화대혁명이 신주(神州) 대지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신룡교 교주 홍안통(洪安通)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수단이 악랄하며 교인들의 아첨을 좋아한다. 그가 한 문자옥(文字獄), 어록, 공덕 칭송 등등은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소행과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홍안통이 그 아내의 조종하에 소년 교인을 크게 발전시켜 구세대 교인을 박해한 것도 홍위병이 노(老)혁명가를 비판, 투쟁한 것을 암시하며 홍안통의 아내와 소년 교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칭(江靑)과 홍위병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무협소설로 중국공산당을 묘사한 김용

‘무협소설의 태두’로 불리는 김용은 1924년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시 위안화(袁花)진에서 태어나 1948년 홍콩으로 이주했다. 1950년대부터 ‘김용’이라는 필명으로 무협 소설을 다수 창작했다.

그의 아버지인 차수칭(查樞卿)은 1950년 중공군에 의해 살해됐다. 진단(震旦) 대학을 졸업하고 서양식 교육을 받은 차수칭은 중국공산당의 ‘진반(鎭反)’ 운동에서 ‘흑오류(黑五類)의 우두머리인 지주계급과 악질분자’로 정해졌다. 차수칭은 1950년 비판, 투쟁을 받은 후 가족 앞에서 처형당했고 가족은 중국공산당 정부에 그를 총살한 탄알 값인 인민폐 10전을 보상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김용은 아버지의 피살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비극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차수칭이 죽은 후 가산을 강탈당하고 방이 두 개인 낡은 집만 남았다. 김용의 의붓어머니인 구슈잉(顧秀英)은 자식 몇 명을 부양할 형편이 안 돼 낡은 집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간부로부터 ‘지주 마누라가 반격을 가해 재산을 되찾으려 한다’고 몰려 공판과 투쟁을 받았고 사흘 밤낮 호되게 매를 맞아 심신이 충격을 받는 등, 일생이 고통스러웠다.

중국공산당의 악행을 뼈저리게 느낀 김용은 펜으로 반격했다. 1957년 홍콩 대공보(大公報)가 중국공산당의 ‘대약진’을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지 않자 김용은 불만을 품고 사직하고 2년 뒤 명보(明報)를 창간했다.

1963년 당시 중국공산당 외교부장인 천이(陳毅)가 “바지를 저당 잡히더라도 핵을 만들겠다”고 하자 김용은 즉시 ‘바지를 요구할지언정 핵폭탄은 안 된다’는 사평을 내고 중국공산당은 “군사력을 최우선으로 하고 인민의 삶을 두 번째로 생각한다. 솔직히 말한다면 결코 좋은 정부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문장에는 중국공산당이 소형 핵폭탄 몇 개를 만들어 어디에 사용하겠는지 질의하고 중국공산당에게 “바지를 몇 개 더 만들어 인민이 입도록 하라!”고 호소했다.

중국공산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중공=폭력+거짓말’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있다. [밍후이왕]
김용의 무협소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지만 배후의 메시지에 주의한 사람은 많지 않다.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은 고대 북방 유목민족이 중원을 침략한 이야기며 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점령한 데 따른 상처를 시사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용 세대와 똑같은 도전에 직면했다. 신흥 북방정권에 가입할지, 아니면 남으로 도망쳐 애국유민이 될지 결정해야 했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중국공산당에 현혹돼 중국대륙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공산당의 박해를 받았다.

니쾅 “애국은 반드시 반공, 반공이야말로 애국이다”

1957년 22살의 니쾅(倪匡)은 네이멍구 후룬베이얼의 노동개조 대대에서 탈출해 홍콩으로 밀입국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이 경험을 회고하며 “내지에서 홍콩으로 오지 않았다면 글을 쓸 기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살아갈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반우파 투쟁’을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고 ‘문화대혁명’에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홍콩에 와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홍콩에 온 후 니쾅은 먼저 힘든 노동을 하다가 소설 ‘생매장’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토지개혁 때 한 지주 부인이 자신의 손자를 생매장하는 이야기인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흙이 가슴까지 차오르자 할머니는 손자를 다독이면서, ‘좀만 참으면 숨이 막히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반나절 만에 쓴 이 소설은 무려 90위안의 원고료를 벌었는데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았으며 호평이 쏟아졌다. 이때부터 니쾅은 글쓰기에 전념했고 그의 창작 능력이 뛰어나 ‘천하제일의 쾌수(快手)’로 불렸다.

니쾅의 반공(反共) 입장은 매우 확고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은 완전히 인류의 역사문명을 위반했다고 인식했다. “공산당의 가장 두려운 점은 세뇌하고 다른 사람의 사상 의지를 통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공산당 제도 안에서 완전히 복종하는 기계로 변한다.”

광둥(廣東)의 토지개혁을 경험한 니쾅은 많은 사람이 중국공산당의 옛 지도자에 대해 아직도 환상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죄 없는 중국 공산당원은 없다.” 공산당이 진보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말했다. “식인종 지도자가 지금 어떠냐고 물어보면 그는 ‘우리는 진보해서 지금은 식칼로 인육을 먹는다’고 말한다. 공산당의 지금 소위 진보는 식탁용 나이프로 인육을 먹는 것이다.”

30년 전 니쾅의 소설 ‘주이룽(追龍)’에서는 동양의 한 대도시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몇 사람의 무지몽매한 결정만으로 한 대도시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고 했는데, 원인은 천재(天災)가 아니라 그 장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니쾅은 이 도시가 홍콩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홍콩에서 사라진 것은 ‘자유’라는 장점이라고 했다. 그는 “주로 언론의 자유이며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의 어머니다. 표현의 자유 없이는 다른 자유도 없다”고 말했다. 2020년 홍콩 국안법(國安法) 아래 공산당 철의 장막에 대조하면 뜻밖에 니쾅의 예언이 들어맞고 있다.

이른바 일국양제(一國兩制)에 대해 니쾅은 속임수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 “나는 일국양제를 전혀 믿지 않는다.” “공산당이 마음대로 정하는데 무슨 일국양제가 있는가? 일국양제는 공산당이 말한 것인데 공산당의 말을 언제 믿을 수 있었는가? 수십 년간 단 한마디도 실현한 적이 없다.”

니쾅은 자신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극에 달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는 일찍 ‘애국은 반드시 반공(反共), 반공이야말로 애국이다’는 구호를 썼다.

공산당에 반대하는 한 중국인이 ‘애당은 애국이 아니며 중공은 중국이 아니다’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중공은 애당이 애국이며 중공이 중국이라고 중국인들을 세뇌해왔다. 양자는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밍후이왕]
중국공산당을 두렵게 만든 ‘반공 원로’ 예칭(葉靑)

20세기, 인생이 꽤 드라마틱한 사람이 있었다. 일찍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중국공산당 여법지부(旅法支部) 서기를 지낸 중국공산당 초기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후에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에 가서 공부했다. 귀국 후 중국공산당 폭동에 참가했다가 국민당에 체포된 후 뜻밖으로 형장에서 총 두 발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중국공산당을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국민당에 체포된 후 국민당 입당을 선택했다. 그 후 ‘삼민주의’를 연구하다가 대만에서 40년을 하루같이 반공(反共)을 고집하며 대량의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중국공산당과 양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중국공산당 ‘전범자’ 명단에 올랐다. 이 사람은 런줘쉬안(任卓宣)이며 널리 알려진 필명은 예칭(葉靑)이다.

예칭은 중국공산당을 떠나겠다고 결정한 후 국민당 창사(長沙)법원 부원장 쭤궈융(左國雍)에게 “나의 공산당의 정치생명은 죽었다! 앞으로 나는 나의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배신’을 중국공산당은 믿기 어려워했고 천두슈(陳獨秀),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은 큰 타격을 받았다.

1936년 시안(西安) 군사반란 이후 국민당은 어쩔 수 없이 중국공산당의 ‘연합항일’ 주장에 동의해야 했다. 예칭이 보기에 각 당, 각 계파, 각 군대를 연합해 항일하는 것은 명백히 공산당, 공산군에 유리하고 국민당 국군에게 불리했다. 그러자 예칭은 선언을 발표하고 그 대신 ‘통일구국’을 하자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반대할 수 없었지만 공산당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었다. 통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공산당은 ‘변경 지역’의 군정 대권을 국민당 정부에 넘겨야 했다.

예칭의 건의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상하이에서 ‘통일구국’ 1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문화건설’ 월간지를 통해 ‘통일구국’이란 특집호를 출판해 상하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공산당의 ‘연합항일’ 구호를 압도했다.

예칭의 건의에 중국공산당과 좌익 진영은 크게 화를 냈고 ‘일본의 경찰견’, ‘민족의 변절자’라고 불렀다. 중국공산당은 직접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보를 보내 예칭 등의 ‘통일전선 파괴’ 죄를 추궁했지만 장제스, 천청(陳誠) 등 국민당 고위 인사들이은 잇따라 예칭을 만나 찬사를 보냈다.

1949년 7월 예칭은 국민당 선전부 부부장으로 임명됐고 이후 부장을 대리했다. 예칭은 서남쪽을 누비며 선전 업무를 지도하고 시국에 대한 관점을 분석하고 ‘제2의 전쟁터’와 ‘경제전’, ‘사상전’, ‘북벌 정신 부흥’을 호소하고 개척했으며 ‘극동 반공국제’를 조직하는 등으로 국민당의 사기를 고무했다.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급소를 찌른 예칭을 몹시 증오했다. 옌안의 마오쩌둥, 장원톈(張聞天), 왕자샹(王稼祥), 천보다(陳伯達), 아이쓰치(艾思奇), 우리핑(吳黎平) 등은 잇달아 문장을 발표해 예칭의 논리를 반박했다. 예를 들면 마오쩌둥은 1939년 6월 10일 옌안 고위 간부회의 보고에서 ‘반투항요강(反投降提綱)’으로 반박했다. “2년 동안, 특히 반년 동안 국민당을 대표해 글을 쓴 사람, 트로츠키파 예칭 등을 포함해 그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진(眞)삼민주의를 반대하는 ‘상이한 잘못된 사상’을 많이 발표했는데……사실 그들은 소위 삼민주의와 국민당의 국정에 적합할 뿐, 즉 국정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가짜 삼민주의와 가짜 국민당이며, 공산주의와 공산당이 전적으로 국정에 적합하다.”

그러나 몇십 년이 지나면서 대만은 민주사회로 향하고 중국 인민은 여전히 중국공산당에게 억압, 박해를 당하고 있다. 이것은 마오(毛)의 말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9)평 공산당은 무엇인가’라고 쓴 현수막을 둔 중국인들

역사학자 위잉스 “‘당천하(黨天下)’의 본질은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날 것”

사상사(思想史) 연구를 전공한 저명한 역사학자 위잉스(餘英時)는 2014년 당상(唐獎) 제1회 한학상(漢學獎)을 수상했다. 2002년 위잉스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중국 대륙은 1949년부터 지금까지 역사가 없다. 어떤 ‘역사’는 가짜이며 정치선전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가짜 역사를 폭로하려면 앞으로 학술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뒤 데이터를 개방하고 원시 데이터에 근거해 말해야 한다.”

위잉스(餘英時)

위잉스는 중국공산당의 ‘당천하(黨天下)’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소위 ‘레닌, 스탈린 체제’는 독재 통치다. 그것의 문화교육에 대한 근본적 태도는 지식을 반대하고 지식인을 적대시했다. 이것은 독재 통치는 필연적으로 추안핑(儲安平)의 소위 ‘당천하’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당이 천하와 인민을 절대적으로 도살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은 전체적으로 사기와 잔혹함을 포함해 폭력으로 빼앗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이 ‘당’이 정권을 잃는 것은 우주 파멸과 같다. 개인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당원’도 마찬가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개인 수중의 ‘권력’을 유지해야 하고 또한 증가할 수 있을 뿐 감소해서는 안 된다. 권력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으며 권력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당원’의 기본 신조다. 스탈린은 ‘공산당원은 특수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정확한 함의는 사실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당내 투쟁도 영원히 멈추지 않고 있다. ‘당천하’의 합법성은 전적으로 특유한 이데올로기 위에 세워졌다. 이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인 진리이며 절대로 어떤 사람이든지 약간의 의심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의심하기만 하면 ‘당천하’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천하’는 본능적으로 지식을 반대하고 지식인을 적대시한다.

중국공산당의 사상 개조운동

구소련의 ‘레닌, 스탈린 체제’는 처음부터 반(反)지식 정신을 철저히 체현했다. 철학, 문예, 사회, 과학, 역사학을 막론하고 ‘당’의 통제 아래 공식 이데올로기와 절대적으로 일치해야 했다. 자연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소위 ‘스탈린 언어학’과 ‘리센코의 생물학’이란 웃음거리를 알고 있다.

레닌은 정권 수립 후 교육에서 먼저 두 가지 특색을 나타냈다. 하나는 과거의 학술 수준을 낮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의 권위에 타격을 주는 것이다. 중학교 교사의 대우가 제일 낮으며 월 급여가 45루블이지만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의 월급은 70루블이다. ‘당’은 더 계획적으로 학생이 수업시간에 교사를 모욕주어 고개를 들 수 없게 유도한다. 중국공산당의 당천하는 체제적으로 소련을 따라 하기에 처음에는 교사를 3등 공민으로 폄하하고 학생을 부추겨 선생님을 공격하게 했다.

따라서 문화대혁명은 하나의 고립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당천하’의 가장 진실한 본질을 보여주는 발전과정 중의 한 차례 절정일 뿐이다. 1942년의 옌안(延安) ‘정풍’과 1957년의 ‘반(反)우파 투쟁’은 그것의 전주곡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도 위에서 말한 과정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 단계에서 ‘당천하’의 본질은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난다.

위잉스는 공산주의가 한 나라의 모든 생산자원과 생활자원을 독점하는 것은 한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식자(識字)는 사람은 혜안이 있어 악마를 알아본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마수에서 벗어나 중국대륙 밖에서 정의를 신장하고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진실을 폭로했다. 바로 역사상에서 바른 것을 북돋우고 악한 것을 제거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마침내 21세기 오늘에 이르러 세계가 중국공산당을 해체하는 거센 흐름을 형성했다. 세계를 현혹한 지 백 년이 지난 공산주의가 곧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인심은 이미 깨어났으니 천멸중공(天滅中共)의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