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상무위원제 폐지’ 첫 번째 타깃은?

리쓰위안(李思緣) 기자
2016년 09월 8일 오전 11:14 업데이트: 2020년 04월 24일 오전 11:44

최근 인하이린(尹海林.56) 톈진(天津) 부시장이 낙마하면서 톈진 관료계의 검은 내막과 함께 그와 장가오리(張高麗)의 관계도 밝혀졌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장쩌민파의 간섭과 방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상무위원제 폐지’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중국 사정 당국이 톈진방(天津幇, 톈진을 근거로 하는 정치세력)을 치고 장가오리를 타깃으로 한 것은 이런 전략의 일부로 보인다.

인하이린은 장가오리가 발탁

지난달 22일,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기위)는 인하이린 톈진시 부시장이 엄중한 기율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인하이린은 톈진시 국토기획과 도시건설 분야에서 장기간 근무하다가 지난 2000년 1월 쯤 톈진시 규획설계관리국(規劃設計管理局·시 토지 관리국)과 시 규획과 국토자원국(市規劃和國土資源局) 부국장직을 맡았다.

그 후 2007년 12월 시 규획국(規劃局) 국장으로 승진한데 이어, 2012년 5월부터는 톈진시 부시장과 시 정법(政法)위원회 부서기와 시 규획국 국장을 겸임했다.

자료에 따르면, 장가오리 정치국 상무위원은 2007년 3월-2012년 11월 사이 톈진시 서기를 지냈는데, 인하이린은 바로 이 시기 시 규획국 부국장으로 고속 승진해 부시장 자리까지 올랐다.

인하이린, 도시계획 이권에 연루

8월 22일 차이신왕(財新網)은 인하이린의 승진 시기와 맞물려 톈진시의 토지 개발이 급속도로 확장됐다고 보도했다. 2014년 폭로된 ‘관얼다이(官二代, 고위관료 자녀) 갑부’ 자오진(趙晉)의 부동산 비리 사건과 2015년 8월 톈진항 폭발 사건은 모두 도시 계획 부처와 관련 있다. 이후 톈진시 발전기획부 간부들의 위기설이 확산됐다.

같은 날 신경보(新京報)의 위챗 공식계정 ‘정지권’(政知圈)은 톈진시 일반 공무원의 발언을 인용해 인하이린의 낙마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터져 나왔으며 모 매물의 토지계획 심사·비준과 관련 있다고 밝혔다.

이 매물은 자오사오린(趙少麟) 장쑤성 당위원회 비서장의 아들 자오진이 소유한 부동산 회사가 개발한 것으로 완공 후 이권 분쟁에 휘말렸다.

자오진은 ‘쭈이뉴’(最牛, 간 큰) 부동산 투자가로 통하는데, 보도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 자오사오린의 권력과 친인척 인맥을 이용해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토지를 빼앗는 수법으로 거대 부동산 제국을 만들었다.

2014년 6월 중순 자오진이 내부 조사를 받으면서 같은 해 10월 자오사오린은 낙마했다. 자오 부자의 비리 사건을 계기로 톈진시 도시건설기획부 관료들의 낙마가 잇따랐다.

인하이린과 ‘톈진방’ 

인하이린은 30여 년간 도시기획 부처에서 근무한 외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직무가 있는데 바로 톈진시 정법위원회(공안·사법 담당) 부서기다.

수 년 동안 행패를 일삼은 수많은 톈진방 간부들은 톈진 정법위원회에 속했다. 이들은 줄곧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 정책을 지지했으며 그 사악한 정도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2006년 6월 12일 톈진시 정법위원회 부서기, 톈진시 검찰원 검찰장인 리바오진(李寶金)이 쌍규(雙規·중앙기율위가 비리 혐의 당원을 정식 형사 입건 전 구금해 조사하는 것) 처분을 받았다. 또 2007년에는 뇌물수수죄와 공금횡령죄로 사형집행 유예를 선고 받았다.

1년 후인 2007년 6월 4일 톈진시 정치협상회의 주석인 쑹핑순(宋平順)이 사무실에서 자살했다. 쑹핑순은 62세 나이로 일찍부터 톈진시 정법 계통을 장기적으로 장악했으며 리바오진의 ‘옛 상사’였다.

이어 톈진시 공안국장 우창순(武長順)이 관련 부서의 조사를 받았다. 차이신왕은 우창순이 베이징올림픽 안전을 이유로 당시 중앙 정법위 부서기 저우융캉(周永康)에 의해 보호받아 조사를 면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우창순은 직급이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승진해 4년 넘게 톈진 정법위원회 부서기와 시 공안국장을 겸임하며 부성급(副省級·차관급) 대열에 들어섰고 톈진시 정치협상회 부주석까지 겸임했다. 그는 2014년 7월에 조사받았다.

쑹핑순, 리바오진, 우창순이 모두 공안계통 출신인 것과 달리, 인하이린은 정법위원회 부서기를 맡기 전 어떠한 정법계통 경력도 없었다. 인하이린은 2012년 5월부터 2013년 3월까지 부시장 신분으로 정법위 부서기를 겸임했다.

인하이린과 우창순이 함께 톈진 정법위원회 부서기직을 맡은 기간은 10개월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은밀한 교섭은 표면상 함께 일한 시간처럼 그렇게 짧지만은 않다.

부동산을 유대 관계로 우창순과 인하이린, 자오진 세 사람은 은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톈진 정법계통에서 10년 간 4명이 낙마한 원인 

2006년 이후 불과 10년 동안 톈진 정법위원회 서기 1명과 정법위원회 부서기 3명이 조사받았다. 톈진시 정법위의 도미노 부패 현상이 나타난 근원을 캐내려 가보면 17년 전 파룬궁 수련생 1만여 명이 중난하이 앞에서 벌인 ‘4.25청원’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를 뒤흔든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수련자 대청원 사건은 같은 해 7월 20일 장쩌민이 대규모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도화선이 됐다. 4월 25일 전 발생한 톈진시 공안국이 현지 파룬궁 수련자를 무력으로 체포한 사건이 바로 4.25 대청원이 일어난 진짜 이유다. 그러므로 중국공산당 정치 운명에서 가장 큰 탄압 사건은 톈진 공안국의 소행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25 사건 당시 쑹핑순은 톈진시 정법위원회 서기와 공안국장을 겸임하고 있었고, 우창순은 시 공안국장으로, 리바오진은 톈진시 검찰원 검찰장으로 있었다. 이 세 사람과 4.25 사건 중에 파룬궁 수련자에게 함정을 판 막후의 최종 검은손, 당시 중앙정법위 서기 뤄간(羅幹)은 모두 정법위가 저지른 악행 사슬과 엮여있다.

파룬궁 탄압을 위해 전력을 다한 선동 행위와, 저우융캉이 톈진에 유달리 관심을 보인 것을 단서로 추적해 보면 톈진시 정법위 고위층의 대붕괴에서도 같은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밖에 톈진의 제일중심병원의 동방장기이식센터가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강제로 적출한 혐의로 ‘파룬궁박해 국제추적조사기구(WOIPFG)’ 조사 명단에 들어있다.

인하이린 낙마로 장가오리 수면으로 떠올라

낙마한 인하이린이 도시발전계획국 국장으로 재임했던 시기, 톈진시는 탕구(塘沽), 한구(漢沽), 다강(大港) 3구의 업무위원회와 관리위원회를 폐지하고 빈하이신구(濱海新區)를 설립했다. 인하이린은 이 빈하이신구의 계획과 건설에 깊게 개입돼 있다.

또한 장가오리가 빈하이신구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미완성 프로젝트를 수없이 남겼고, 600억 위안을 투자해 건설한 빈하이신구 본부의 경제 핵심구인 샹뤄(響螺)만 경제특구가 결국 도처가 빈 ‘유령도시’가 됐다. 빈하이신구 개발과 건설을 책임진 건설투자집단은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됐고, 톈진 타이다(泰達) 투자공사의 대표이사인 류후이원(劉惠文)은 2014년 4월 자살했다.

2014년 7월 9일 중공중앙 순시조(巡視組)가 톈진을 감찰한 두 달 후, 톈진시에 ‘문제 명세서’를 보냈다. 그 중에는 ‘국유기업 중요사건 빈발, 심각한 도시건설 분야의 부정부패’ 등 문제가 포함돼 있었다.

한 언론 보도에 의하면 2015년 중국 양회(兩會) 개최 전, 왕치산(王岐山)은 톈진시에 2007년 이후의 ‘당정(黨政) 지도자 주요구성원’의 회의 기록과 정부공사개발자금 대출 등 원본 증빙 서류를 완벽하게 보존해야 하며 ‘누구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등을 요구했다.

장가오리, 많은 중요 사건에 연루

앞서 장가오리가 사모펀드 사건 및 수천 억 비리 자금에 연루돼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장가오리가 톈진에서 집권할 당시, 그의 선동과 제안 하에 각양각색의 사모 주식 펀드가 난발됐다. 2010년 초부터 2012년까지 수많은 회사가 차압당하고 몇 십만 가정이 재난을 겪었다. 중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피해자들이 톈진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신고했으며 심지어 ‘장가오리는 빚을 갚아라!’는 구호까지 외쳤다.

톈진 사모펀드 사건 이외에도 장가오리가 톈진 정권을 쥐고 있으면서 세운 가장 큰 정치 업적은 빈하이신구 개발으로, 작년 8월 12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대폭발 사건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다.

올해 2월 중국 국무원은 톈진항에 위치한 루이하이(瑞海) 국제물류회사의 위험물 적재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폭발 사고가 난 조사보고서에 답변하며, 톈진시 건설계획 책임자인 인하이린 부시장이 시정부에 심도 있는 반성을 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외부에서는 장가오리의 사돈이 폭발사건 관련 회사인 루이하이국제(瑞海國際)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전했다.

2015년 8월 23일 홍콩 빈과일보(蘋果日報)는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해 시진핑이 당일(8월 12일) 저녁 밤새 상무위원회의를 열었고 관련 회사인 루이하이국제에 ‘특별히 견고한’ 보호우산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중국 중앙판공청 주임 리잔수(栗戰書) 등은 이 사건이 시진핑을 겨냥한 ‘특수한 정치의도’가 있는지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폭발이 일어난 후 이튿날인 8월 13일, 해외 인터넷 사이트 모리화(茉莉花)에 류강(劉剛)이라는 사람이 ‘톈진 대폭발 사건은 시진핑을 겨냥한 테러’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음모론에 따르면 톈진 대폭발도 분명 중국공산당 권력 투쟁의 부산물이며, 재야 정치권이 만든 민간 참사다. 그 목적은 중국 집권자에 대한 위협, 엄포 및 위기를 조성하고 더 나아가 시진핑에게 타협과 복종을 압박하고 심지어 재난을 일으켜 그를 탄핵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사실인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인터넷상에서는 줄곧 톈진 대폭발 사건은 장쩌민이 시진핑과 협상을 위해 이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어왔다. 당시 시진핑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장쩌민을 잠시 억류하기도 했다.

톈진 대폭발 사건의 내막은 현재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인하이린의 낙마와 장가오리에 대한 각종 소문으로 다시 표면화되고 있다.

장가오리는 장쩌민이 발탁..파룬궁 강제 장기적출에 동조

이전에 톈진을 담당했던 장가오리는 장쩌민파의 중요 인물로 18차 당대회 이후 암암리에 시진핑과 대적했다. 장가오리의 관직 생활에는 모두 장쩌민의 도움과 발탁이 있어왔다.

장가오리의 줄곧 장쩌민을 뒤따라 파룬궁을 잔혹하게 박해했다.

2015년 6월 24일 ‘파룬궁박해 국제추적조사기구’ 조사원은 장쩌민 사무실 비서로 위장해 카자흐스탄을 방문 중인 장가오리를 대상으로 조사 및 증거 수집을 진행했다. 목적은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장기적출 명령을 내린 부분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당시 장가오리는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장기적출 명령을 내린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고, 조사원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대해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장쩌민이 그에게 “정치국 회의에서 이 사건을 추궁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꼭 그렇게 할 것”이라고 적극 승낙하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파룬궁박해 국제추적조사기구’의 장가오리에 대한 조사는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강제 장기적출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과 장가오리 역시 장기적출의 주요 참여자 중 한 명임을 드러냈다. 또한 “나머지 파룬궁 수련자들도 잘 처리해야 한다”는 조사원의 발언에 승낙한 것은 대량의 파룬궁 수련자들을 수감한 살아있는 장기 창고가 지금까지 존재하며, 파룬궁 수련자들이 여전히 강제 장기적출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또한 장가오리는 “국내외의 만 명에 달하는 파룬궁 수련자들이 장쩌민을 고소한 사실이 이미 공산당 고위층에 상당한 압력을 조성했다”고 표명했다.

상무위원회 폐지 가능성..첫 번째 타깃은 장가오리

현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장가오리, 류윈산, 장더장은 장쩌민의 측근이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장쩌민을 추종하며 파룬궁을 탄압해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했고 곳곳에서 시진핑 현 정부와 맞섰다.

현재 시진핑이 끊임없이 장쩌민 계파를 척결하는 와중에 장쩌민파 상무위원과 시진핑 지간의 모순은 끊임없이 격화돼 시진핑의 집권을 심하게 방해하고 있다.

올해 들어 시진핑 당국이 대통령제 가능성과 상무위원제 폐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다.

외신은 시진핑이 일찍부터 상무위원제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비록 국가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등 직무를 맡고 있지만 시진핑이 심화개혁소조를 포함한 각 소조의 조장을 맡는다는 것은 그가 상무위원제에 지극히 큰 불만을 갖고 있다는 신호이며, 또한 그가 현재의 중국공산당 전반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장쩌민은 2002년 자리에서 물러서기 전에 ‘9명 상무위원제’를 만들었다. 또 매 상무위원이 각자 한 분야를 담당하고 다른 상무위원은 거의 간섭할 수 없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법위다. 파룬궁 박해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2007년부터 저우융캉이 정법위 서기가 되고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들어섰다. 그 이후 저우융캉의 정법계통 정책은 다른 상무위원이 전혀 간섭할 수 없었다.

정법위는 한동안 장쩌민, 저우융캉이 장악한 ‘제2의 중앙’이 되어, 파룬궁과 민중에 대한 박해 정책을 유지해 왔으며 장쩌민에 대한 숙청을 피해왔다.

18차 당 대회 이후, 9명 상무위원제가 7명 상무위원제로 다시 바뀌었다. 비록 정법위 서기가 더 이상 상무위원은 아니지만 상무위원들의 ‘독립 왕국’이 여전했다.

시사평론가 스주톈(石久天)은 “‘톈진방’은 장쩌민 세력으로 정법위에서 갖은 악행을 저질렀으며 세력이 막강하다. 이번 인하이린의 낙마는 톈진방에 대해 계속 청산하는 한편, 시진핑이 인하이린을 척결함으로써 창끝을 장가오리에게 돌린 것이다. 목적은 장쩌민파 상무위원들의 훼방과 저항을 타파하려는 것으로, 결국 상무위원제를 취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