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비밀계좌’ 뒤안길로…고객정보 각국 제공 마무리

김윤호
2022년 01월 10일 오전 10:48 업데이트: 2022년 06월 3일 오후 3:54

스위스연방조세국(SFTA)이 스위스 은행을 이용하는 역외 이용자 정보를 2021년 말까지 100개 국가·지역에 넘겨주는 작업을 거의 완료했다.

세계 최대 역외 금융 중심지인 스위스가 수백 년간 고수한 은행 이용자 정보 비밀유지 제도를 포기한 것이다. 세금 회피 목적으로 스위스 은행에 돈을 숨겨온 세계 부호 고객은 물론 테러리스트, 범죄조직, 중국공산당 관료를 포함한 독재국가 관리들까지 중요한 재산 은닉처 하나를 잃게 됐다.

스위스는 지난 수백 년간 엄격한 은행 비밀제도와 정치 중립 입장을 견지한 데 힘입어 전 세계 은닉 자산의 약 3분의 1을 관리해 왔다.

스위스 은행들은 약 300년 동안 자체적으로 이용자 정보를 보호해 왔으나, 스위스는 1935년에야 이를 법으로 제도화했다. ‘스위스 은행법(Bankgesetz)’에 따르면 정부 기관이 이용자 정보를 열람하거나 은행에 정보 제공을 요구할 수 없고, 예금자의 범죄행위가 입증되지 않는 한 관련 정보는 영구적으로 보호된다. 또한 이용자는 익명으로 거래할 수도 있다.

스위스는 세율도 미국이나 고세율 고복지 정책을 펴는 상당수 유럽 국가보다 낮다. 이는 세계 부호들이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를 애용한 또 다른 이유다. 이는 각국 부자들에게는 조세 피난처를 제공하고, 테러리스트와 독재정권에는 불법자금 은닉처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스위스는 미국과 유럽 등으로부터 압박을 받아왔다.

스위스, 미국과 유럽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비밀주의 포기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인 5만2000명의 계좌 정보를 내놓으라고 스위스 은행권 거물인 스위스 금융그룹(UBS)을 압박했다. 당시 미 법무부는 UBS가 이들 미국인의 미납세 자산 십수억 달러를 숨겼다며 고발했다.

2008년 7월 미국인들이 역외 계좌를 통해 재산을 숨기는 데 스위스 은행들이 관여한 의혹을 조사하던 미 상원 조사담당 상설 소위원회는 UBS를 포함한 스위스 은행이 180억 달러 규모의 미국인 자금을 숨겨주어 미국에 막대한 세수 손실을 입힌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UBS는 미국이 소송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벌금 7억8000만 달러를 내고 또 탈세 혐의를 받고 있는 미국인 280명의 명단과 비밀 거래를 하는 미국인 이용자 4500명의 계좌정보를 미국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다. 스위스는 이때부터 수세기 동안 지켜온 비밀주의를 포기했다.

그러나 미국은 스위스 정부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은 2010년 3월 미국인의 조세 회피를 추적하는 ‘해외금융계좌신고법(FATCA)’을 통과시켜 비미국계 은행도 미국 이용자의 계좌 정보를 미 세무당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2014년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연차총회에서 스위스는 미국을 위시한 OECD 회원국, 중국 등 총 47개국과 FATCA에 기초한 자동 금융정보 교환의 새로운 기준인 다자간 금융정보교환협정(CRS)에 서명했다. 스위스 은행들은 이 기준에 따라 점차 전 세계 관련국과 고객의 계좌 정보를 교환했다.

2017년 초부터 CRS가 공식 발효되면서 스위스는 3세기 동안 지켜온 은행 비밀주의를 완전히 포기했다.
스위스는 2018년부터 금융정보 자동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과 유럽 등 38개국과 금융정보를 교환하고 있고, 그해 9월 다른 나라 세무기관에 은행 계좌 200만 개를 넘겼다. 하지만 중국·러시아·아랍에미리트(UAE) 등 23개국과의 정보자동교환은 2019년부터 시작됐다.

2021년 10월 11일까지 스위스 세무당국이 협정을 체결한 국가에 제공한 은행계좌 정보는 약 330만 개에 달한다.

EU도 비EU 국가인 스위스를 계속 압박해왔다. EU는 2017년 12월 스위스를 비협조적인 조세피난처 명단인 ‘그레이 리스트(grey list)’에 포함했다. 이 리스트에는 EU 기준에 부합하도록 국제세무 준칙을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전면적으로 시행하지 않은 국가·지역들이 올라있다.

EU는 스위스 당국이 2019년 10월에 100여 개국과 금융정보를 교환하기로 약속한 후에야 스위스를 이 명단에서 제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