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만을 탐한 지도자…장쩌민 그는 누구인가? -서문

편집부
2014년 09월 5일 오전 9:50 업데이트: 2022년 12월 5일 오후 8:29

에포크타임스는 장쩌민 전 중국 국가 주석에 대한 각종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그의 실체를 파헤친 분석집 『장쩌민 그 사람(江澤民其人)』을 펴냈다.

지금까지 장쩌민에 관한 평전은 캐나다 기자 브루스 질라와 미국인 금융가 로버트 로렌스 쿤에 의해 두 권이 출간됐지만 모두 과거 행적 미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브루스 질라는 “화장실에서 장쩌민을 잠깐 마주친 일을 계기로 장쩌민 평전을 쓰게 됐다”고 소개했다. 질라 스스로 밝혔듯 중국 정부의 공식 문서와 관영 언론이 제공하는 자료만을 토대로 했기에, 그가 쓴 평전 속 장쩌민은 “톈안먼 사건 후 중국 인민의 불만을 무마하는 데 그친 임시 지도자 그 이상”의 인물로 치켜세워졌다. 중국 공산당의 톈안먼 유혈 진압을 지지해 차기 권력으로 발탁된 장쩌민의 과거를 아는 이들에게 질라가 쓴 글은 웃음거리가 됐다.

중국문제 전문가이지만, 한 번도 장쩌민을 만나본 적이 없는 쿤은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이라는 이름의 책을 펴냈다. 그러나 중국 작가 예융례(葉永烈)에 의해 각색된 ‘작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독자의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쓴 책들은 미국, 한국,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소개돼 진실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장쩌민에 대한 부풀려진 이미지 형성에 일조하고 있다.

장쩌민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 당시 유혈진압을 지지하며 최고 권력에 올랐다. 톈안먼 학살의 빚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도자다.

또한 파룬궁 탄압, 부패행위, 매국행위 등으로 거대한 죄악의 빚을 진 파렴치한 인물이다. 중국 외부인은 장쩌민이 걸어온 수치스러운 행적을 파악하기 어렵다. 에포크타임스는 각종 기록와 목격담, 공산당 고위층에게서 얻은 자료를 근거로 전생에서부터 현생, 그리고 미래까지 그의 모든 면모를 철저히 분석했다.


 

만약 하늘이 사람의 운명을 정해준다면 역사적으로 일부 사람들이 부끄러운 배경을 가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03년 3월 12일, 전인대 후베이성 대표단 토론회에 참석한 장쩌민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우한(武漢)시 보일러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가 마침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는데… 반란파들이 제 배경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답니다. 그 때는 불쾌했지만 결국 문제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요”라고 말했다.

국가주석 장쩌민이 무엇 때문에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배경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을 했는지 듣는 사람들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장쩌민의 가정 배경이 확실히 떳떳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쩌민의 아버지 장스쥔(江世俊, 또는 江冠千)은 일본군 강점시기에 매국노였으며 장쩌민은 일본 괴뢰정부가 난징(南京)에 설립한 중앙大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를 숨기기 위해 자신은 혁명 열사인 삼촌의 양아들로 자랐다고 거짓말을 했다. 또 소련에서 유학하는 동안 소련 전직 비밀 첩보국(KGB)은 여색을 밝히는 장쩌민의 추악한 면을 이용해 그를 스파이로 만들었고 ···.

이처럼 장쩌민의 진실한 배경은 현재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고 극히 은폐되어 있어 문화대혁명 시기 반란파들도 장쩌민에 의해 조작되고 숨겨진 역사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장쩌민이 미국 사업가 로버트 로렌스 쿤에게 부탁해 2005년에 발표된 ‘장쩌민 평전(한글판 명: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은 장쩌민의 은폐된 역사를 숨기기 위한 흔적이 역력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

장쩌민 평전에서 가장 흔히 출현한 단어는 ‘애국’이었으며 심지어 그가 일본 괴뢰정부 대학을 다닌 경력을 쓴 부분에도 ‘나는 애국자였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애국은 자신을 길러준 국가에 대한 국민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서 자신이 애국자라고 떠들고 다닐 사람은 장쩌민밖에 없을 것이다.

장쩌민 아버지가 매국노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출신 성분을 중요시하는 중국에서 장쩌민은 자신의 평전을 포함해 평생 아버지를 거론하는 것을 피해왔으며 기껏해야 ‘생부가 1973년에 돌아가셨다’는 한마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장쩌민은 13세 때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삼촌(공산당원) 장상칭(江上靑)의 양아들로 들어갔다고 꾸며댔다. 그렇다면 21세 때 대학을 졸업한 장쩌민을 8년 동안 누가 키운 것일까? 로버트 로렌스 쿤의 장쩌민 평전에 의하면 장상칭의 딸 장쩌후이(江澤慧)는 자신의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장쩌민이 다녔던 귀족 중학교와 난징중앙대의 비싼 학비를 대준 것이며, 누가 시국이 어지럽고 물가가 날마다 높아지던 시절에 장쩌민에게 서예 등 장기들을 가르쳐 주었으며, 누가 졸업하자마자 장쩌민에게 상하이에서 미국식 지프를 타고 드라이브를 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장쩌민의 생부가 장쩌민을 20년 동안 키운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이 8년 전에 사망한 장상칭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장쩌민의 삶은 전혀 ‘양아들’과 관련이 없었지만 공산당이 천하를 얻게 되자 장쩌민은 가족 중에 공산당 출신 열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양아들’로 변신한 것이다.

우리는 ‘배경’을 물고 늘어지려는 것이 아니라 장쩌민이 자신의 배경을 숨기고 허위사실을 꾸민 사례를 들어 속임수를 일삼는 장쩌민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장쩌민은 심지어 노후에는 한술 더 떠 매국노였던 아버지를 은근슬쩍 항일 영웅으로 묘사했다. 장쩌민은 자신의 평전에서 사촌 여동생 장쩌후이의 입을 빌려 여러 차례 “우리 가족은 모두 혁명자다”,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갔다”, “그들은 모두 혁명에 참가했는데 일본 침략자와 국민당과 맞서 싸웠다” 등의 발언을 하도록 시켜 장쩌민 가족의 내막을 모르는 독자들을 교묘하게 속였다.

‘인민일보’는 1999년 12월 11일, 장쩌민과 옐친이 베이징에서 중러 국경협의서에 조인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로버트 로렌스 쿤의 장쩌민 평전에서는 이 회담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알다시피 장쩌민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노래 한 곡 불러준 사소한 일까지 평전에 정중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외국 지도자와의 회담은 더더욱 빠짐없이 기록했는데 무엇 때문에 옐친과 국경협정을 맺은 중요한 사건만은 빼먹은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장쩌민은 그 회담에서 중국 정부가 역대로 승인하지 않은 중러 불평등조약을 전부 승인하는 매국협정을 체결해 후대 자손들이 잃어버린 땅을 합법적으로 되찾을 수 있는 증거를 소멸했으며 대만의 수십 배에 해당되는 100여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옥토를 러시아에게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외 중국인들의 질책을 받고 있는 장쩌민은 여론이 두려워 이와 같은 사실은 평전에 넣지 않았으나 은폐로 인해 오히려 역효과가 커지고 있다.

장쩌민은 평전에서 자신을 인민의 고통를 헤아릴 줄 아는 지도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1998년 9월 상순, 대홍수가 터져 수많은 국민이 죽음의 문턱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때 장쩌민은 영화계 인사들을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 초청해 놓고 로버트 쿤에 의해 ‘장쩌민의 즐거운 시간’으로 묘사되고 있는 연회를 열었다. 연회에서 장쩌민은 여배우를 시켜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신이 직접 구소련의 유행가 ‘모스크바 외곽의 밤’을 연주했다.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장쩌민은 또 연회석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바다여, 내 고향’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쿤은 그의 책에서 ‘특히 장쩌민이 가장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고 묘사했다. 국민들은 홍수로 인해 물바다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데 국가 주석인 장쩌민은 아늑한 중난하이에서 ‘바다여, 내 고향’을 흥겹고 부르고 있었다니 이런 추태가 또 어디 있겠는가? 매국노 가정 배경을 숨기고 고위층에 올라간 장쩌민의 마음속에 국민의 생사란 없었다.

장쩌민은 또 쿤에게 자신을 검소한 생활을 하며 앞장서서 부패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중국 관리들의 부패의 근원은 바로 장쩌민과 그의 가족들에게 있다. 능력 없고 성품도 좋지 않으며 오직 돈밖에 모르는 장쩌민의 아들들은 장쩌민 가문을 돈의 왕국으로 만들어 명실상부한 ‘중국 제일의 탐관오리’가 되었다.

중국 민간에서는 일찍부터 장쩌민이 상하이에서 리센녠(李先念, 역주-중국 전(前) 국가주석이자 장쩌민의 장인)의 내연녀에게 생일 케이크를 선물하려고 당시 손님을 만나고 있었던 리센녠을 문밖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에는 이 소문이 사실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었으나 장쩌민이 자신의 평전에서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생일 케이크 사건을 해명하고 나서면서 사람들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장쩌민은 평전에서 그 생일 케이크는 ‘호텔에 남은 마지막 케이크였다’며 ‘국가 사무에 바쁜 지도자에게 존경을 표하고 주요 인물과 뜻을 같이하기 위해서였다’고 그 사건을 미화했다. 장쩌민의 말대로라면 중국에는 부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뇌물을 주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에게 존경을 표하고’, ‘뜻을 같이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장쩌민은 자신을 열사인 삼촌의 고아로 꾸며 삼촌의 전우였던 왕도한(汪道涵)과 장아이핑(張愛萍)의 도움을 받는 동시에 중공 고위층에 아부하는 술책으로 최고 지도자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장쩌민은 정권을 잡은 뒤 줄곧 자신을 뽐내기 위해, 외국 정상과 만날 때마다 국제적인 외교 예절과 중국 민족의 존엄을 무시한 채 춤과 노래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장쩌민을 ‘광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스페인 국왕과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빗을 꺼내 들어 머리를 빗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훈장을 걸어줄 때 못 참겠다는듯 빼앗아 자신이 직접 목에 걸기도 하고, 국빈 연회 도중에 갑자기 초청국 영부인의 손을 끌어다 함께 춤을 추는가 하면,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나 ‘오솔레미오’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하고, 음란한 눈빛으로 연회석 아가씨들을 바라보며 기타를 연주하기도 하고 ···. 이러한 황당한 광대극은 모두 서양 언론의 놀림감이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과의 몇 차례 회담만 보아도 그렇다. 93년과 97년 장쩌민의 미국 방문과 98년 클린턴의 중국 방문 때, 장쩌민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의 공연이 끝난 뒤 언제나 클린턴에게 색소폰을 연주할 것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97년 장쩌민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티베트 문제와 관련해 질문을 했지만 장쩌민은 갑자기 ‘목장에 있는 집’을 소리 높이 불러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장쩌민은 또 링컨 연설을 잘 외우기로 유명하다. 학생들을 만날 때나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을 때, 출국할 때마다 장쩌민은 링컨의 연설을 한 번씩 외우는데 누가 외우라고 하지 않아도 외우고 다른 사람이 한번 외워보라면 더욱 신나서 외우는데 큰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체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쩌민이 가장 능란했던 것은 그래도 외국어라고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하게 되자 이미 칠순이 넘은 장쩌민은 몇 달 동안 국가사무도 돌보지 않고 기자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을 정도의 스페인어 인사말을 집중 훈련했는데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뽐내려는 광대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평전에서 “만약 언어의 차이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의견을 나누고 협의에 이를 수 있겠는가?”라고 해명했지만 그 정도 외국어 수준으로는 그 나라 사람들과 교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전 세계의 그렇게 많은 국가 지도자가 각자 다양한 모국어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들이 모두 언어 때문에 외교 협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공산국가의 역대 지도자들이 비교적 경직된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구 정치인들은 정신이상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장쩌민을 특이한 공산당 지도자라고 하면서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정말 능력 있고 지략 있는 지도자라면 이처럼 쇼에만 공력을 들이지 않겠지만 대학시절 문예부장을 지낸 실력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쩌민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광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서양 정치인들이 붉은 카펫으로 장쩌민을 환영하는 것은 장쩌민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상품 주문 서류와 거대한 중국 시장 때문이었다.

중국은 개혁개방 후 20년 동안 서양 사업가들의 50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중국 투자와 부지런한 국민의 저렴한 노동력으로 경제발전을 가져왔다. 거액의 자금, 저렴한 노동력, 능력 있는 인재 이 세 가지 요소로 인해 중국은 풍부한 상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무능하고 독단적이며 질투심이 많고 보수적인 장쩌민은 중국의 정치개혁을 퇴보하게 만들었고, 사회 도덕이 전면적으로 타락하고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하도록 했으며, 경제발전과 동시에 자원, 환경, 생태 및 사회에 거대한 파괴를 조성했다. 쇼윈도와 같은 중국의 경제 번영은 사실 후대 자손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생존환경을 희생시킨 대가로 이룬 것이다. 민족의 미래에 대한 무책임, 중국 정치개혁의 퇴보와 인권, 신앙에 대한 전무후무한 유린 등으로 볼 때, 역사의 죄인인 장쩌민은 이미 저지른 죄를 갚을 방법이 없다.

장쩌민은 쿤에게 자신을 능력 있는 지도자로 묘사하게 했지만 사실 그는 홍수, 대사관 폭격, 대만 선거, 사스 발생 등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다른 사람을 내세우고 자신은 거북이처럼 등껍질 속에 목을 움츠려 넣었다. 특히 사스가 폭발했을 때 장쩌민은 목숨이 두려워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평전에다 “계속 상하이에 있었다”고 변명했다. 상하이에 가기 며칠 전에 열렸던 전인대 정협회의에서 장쩌민은 발언까지 했는데 “계속 상하이에 있었다”는 변명을 누가 믿겠는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사방에서 쇼를 한 것 외에도 장쩌민의 진정한 마음의 병이자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 바로 파룬궁 탄압이다. 외부에서는 장쩌민이 외교 장소에서 파룬궁을 비방하는 내용의 소책자와 전단을 돌린 사실만 알고 있을 뿐 2002년 3월 5일 저녁, 창춘(長春) 파룬궁 수련생들이 8개 유선TV 채널에 파룬궁의 진상을 알리는 프로그램을 45분간 방송한 뒤 장쩌민이 신속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쿤은 책에 장쩌민과 절친한 창춘의 한 인사의 말을 기록했는데, 그 인사는 파룬궁 진상 프로그램 방송이 끝나고 10분이 지난 9시 10분 장쩌민이 자신에게 전화를 해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춘 유선TV에 삽입 방송을 했다는 걸 알고 있나? 창춘시 서기가 도대체 누구야?!”라고 화가 나서 물었다고 했다.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에 신속한 반응을 보이고 즉시 현지 서기의 책임을 물었다는 것은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의 총지휘관이며 직접 보고를 받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와 비교되는 것은 중국 대사관이 폭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장쩌민이 며칠 동안 잠잠했다는 사실이다.

장쩌민은 평전에서 자신이 말했던 말들을 인용해 자신을 변호하고 미화하고 있지만 우리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다 알다시피 부패로 낙마한 관리들치고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주장한다’고 외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말주변이 좋고 쇼에 능란한 장쩌민은 더욱 그렇다.

아버지에 대한 불효, 단체에 대한 배신, 인민에 대한 불성실은 장쩌민에게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어기고 중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추악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만약 우리가 장쩌민이 허위사실을 자신의 평전과 비석에 기록하도록 허용한다면 자손들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쿤의 장쩌민 평전은 거짓과 모순이 넘치며 장쩌민의 일생 역시 거짓과 자아 모순으로 얼룩진 일생이다.

장쩌민의 진실한 모습을 알려주는 것은 장쩌민의 일생을 죽 지켜 본 증인인 우리 이 한 세대의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이다.

[발단] 당나라 시기 천년 원혼이 후세에 사악하고 괴상한 인물이 되다

당나라 무덕(武德) 9년, 당고조 이연(李淵)은 차남 이세민(李世民)이 18할거세력을 소탕하고 72갈래 무장봉기를 평정한 덕분에 천하를 통일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당고조는 건성(建成), 세민, 원길(元吉), 원패(元覇)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원패는 어렸을 때 일찍 죽고 나머지 세 명은 각각 영왕(英王), 진왕(秦王)과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

건성, 원길은 아버지의 애첩 장염설(張艶雪), 윤슬슬(尹瑟瑟)과 간통하다 진왕 이세민에게 들통났다. 진왕은 이 사건을 밝히지 않고 얼버무려 지나갔지만 그들은 오히려 마음속에 원한을 품었다. 게다가 건성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는데도 이연이 늘 당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컸던 이세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아 건성과 원길은 세민을 매우 질투했다.

‘원(元)’과 ‘길(吉)’ 두 자를 합치면 ‘당(唐)’자와 비슷하므로 원길은 천자의 명을 타고났다고 자처하며 왕위를 노린 지 오래되었다. 맏형 건성이 나약하고 제대로 성사시키는 일이 없는 까닭에 원길이 왕위를 빼앗는 데 있어서 세민만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하여 원길은 우선 건성의 손을 빌려 세민을 제거한 후 다시 건성을 없애려고 밤낮으로 음모를 꾸몄다.

마침 병을 앓고 있던 평양(平陽) 공주(역주-당고조 이연의 딸)가 죽어 문무 종친들이 모두 장례에 참석했다. 건성과 원길은 일부러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진왕 이세민을 부른 다음 술에 독약을 탔다. 진왕은 천성이 너그러워 건성과 원길이 잘못을 뉘우치려는 줄 알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잔을 들어 마시려고 했다. 그러나 자고로 “왕이 될 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진왕이 겨우 한 모금 마셨는데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똥을 술잔에 떨어뜨리고 진왕의 의복까지 더럽혔다.

진왕이 의복을 갈아입으러 가려고 몸을 일으키는 데 갑자기 배가 끊어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진왕은 집으로 돌아간 후 설사하고 피를 토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 일을 알게 된 당고조는 형제끼리 서로 원수를 맺을까 두려워 진왕을 낙양으로 가게 해서 산시(陝西) 동쪽을 모두 다스리게 하는 동시에 한나라 양효왕(梁孝王) 이야기처럼 황제의 깃발을 하사했다. [역주-한나라 효문제(孝文帝)의 막내아들 양효왕은 어머니 두태후(竇太后)의 총애를 받아 황제의 위엄을 대표하는 깃발을 하사받았다. 이 깃발을 들고 많은 신하와 함께 외출하는 양효왕은 황제보다 더 위풍이 있었다고 한다.]

건성, 원길은 진왕이 담력과 지모가 뛰어나고 흉금이 바다와 같이 넓어 장손무기(長孫無忌), 서무공(徐懋功), 이순풍(李淳風),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와 같은 문관과 진숙보(秦叔寶), 정교금(程咬金), 위지경덕(尉遲敬德), 이정(李靖) 등 무관이 있는 데다 천하의 인심을 얻어 훗날 봉기를 일으키면 당해낼 자가 없음을 알고 크게 두려워했다. 그래서 다시 음모를 꾸며 진왕의 수하 대장군들을 돌궐로 원정 보내려고 했다.

진왕은 일이 긴급하게 돌아가자 이 일을 당고조에게 알렸다. 당고조는 건성과 원길에게 이튿날 황궁에 와서 자초지종을 밝히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음 날 건성과 원길은 진왕을 죽이기 위해 악당 400-500명을 거느리고 현무문(玄無門) 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진왕은 미리 알고 갑옷을 걸치고 나타났다. 건성, 원길은 진왕을 보자 곧 활을 세 번 쐈지만 진왕은 모두 피했으며 오히려 건성을 한 방에 쏴 죽였다. 원길은 도망치려 했으나 위지경덕이 쏜 화살에 맞아 그대로 숨졌다. 이 일을 역사상 ‘현무문의 변’이라 한다.

원길이 죽은 뒤 그 악한 영혼은 업(業)을 갚아야 했으므로 지옥에 떨어졌다. 염라대왕은 아버지 당고조의 애첩과 간통하고 이세민의 약혼녀를 강간한 뒤 살해하는 등 인륜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고, 독주와 화살로 진왕을 살해하려고 악독한 음모를 꾸민 십악불사(十惡不赦)한 원길을 무생지문(無生之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처넣고 천 년 동안 고통받게 했다. 그리하여 원길은 본래 모습을 잃고 온전한 사고능력이 없어졌으며 오직 한 가닥 질투의 기운만 남았다. 이는 이후의 이야기이다.

이세민은 즉위하자 자신을 태종 황제로 칭했으며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바꾸고 정관의 성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인덕(仁德)이 하늘같이 두텁고 백성의 고통를 잘 헤아리는 당태종의 왕위 계승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따르고 아래로는 민심에 맞아 실로 천하 백성의 복이었다.

정관 22년,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구해 돌아오자 태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주작교에서 영접했으며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만들어 그 성대한 사건을 기록했다. 정관 23년,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도교와 유교를 널리 전했으며, 인의지용(仁義智勇)을 고루 갖춘 성품을 가지고 있었고, 욕심이 적었으며 자신을 엄하게 단속하고 백성을 사랑했다.

당태종의 비범한 내력은 세인들의 좁은 식견으로 알 수 있을 바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 하늘의 정기를 지니고 황제, 왕, 장군, 재상 혹은 문인 학자, 무학종사(武學宗師) 등 다양한 인물로 번갈아 환생했는데 일일히 열거하기 힘들다.

그렇게 천 년이 지나 마침내 법륜성왕(法輪聖王)이 미륵불로 세상에 내려와 대법(大法)을 전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있는데 우주의 구세력은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혀 정념과 이성이 없으며, 우둔하고 사악하며, 간사하고 추하며, 과시심과 질투심이 많고 담이 작은 인간의 탈을 쓴 어릿광대를 만들어 정법이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방해하게 하고는 상생상극의 이치에 부합되게 하는 동시에 대법제자(大法弟子)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어릿광대를 이 세상에 어떠한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도 그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는 기필코 만고의 큰 죄를 저질러 온 우주에 악이 넘치게 할 것이므로 이용당한 뒤 반드시 소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간지옥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으며,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구도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나중에 당태종 시기에 악인 원길을 발견했는데 아직도 한 가닥 사악한 질투의 기운으로 남아 있었기에 그것을 음기가 가득한 세상의 무덤에 몰아넣었다.

그 무덤 안에는 일찍이 두꺼비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는데 그 두꺼비가 울어대려는 순간 천 년의 사악한 기운이 그 뱃속에 들어갔다. 그 충격으로 두꺼비의 원래 영체는 그 자리에서 두꺼비 몸을 떠나 환생하러 갔고 천 년의 사악한 기운이 두꺼비 영체를 대신했다. 몇 년 후, 두꺼비가 죽자 이미 두꺼비 모습을 갖춘 사악한 영체는 사람으로 환생해 장쩌민(江澤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