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우크라이나 사태로 중국 공산당에 튄 불똥

왕요췬(王友群)
2022년 02월 27일 오후 10:23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11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4일 새벽 대국민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특별 군사작전’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중요 시설들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번 전쟁의 시비곡직을 가리는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취한 행동만 놓고 보면 중국 공산당(중공) 당국은 이번 사태로 최소 세 가지 난제에 직면하게 됐다.

하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두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한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푸틴 대통령은 21일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고 두 공화국의 ‘요청’에 따라 이 두 공화국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우크라이나는 주권이 독립된 국가이고, DPR와 LPR은 국제적으로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

외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다른 나라의 영토 일부를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 나라의 주권과 영토 완전성, 안보를 침해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제재를 당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앞서 왕이(王毅) 중국 외무부장은 지난 19일 뮌헨 안보회의 화상 연설에서 “어떤 국가든 주권과 독립, 영토 완전성은 국제관계의 기본 준칙이기 때문에 응당 존중받고 지켜져야 한다. 우크라이나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단행한 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4일 오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기자들은 베이징이 러시아의 행위를 침공으로 보고 있는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 완전성을 침해했는지에 대해 거듭 질문했다.

화 대변인은 왜 답변을 회피했을까? 대답하기에 너무 어려운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동부 두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평화유지군’을 파견할 수 있다면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도 대만의 독립을 인정하고 ‘평화유지군’을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왕이 부장이 뮌헨안보회의에서 주장한 대로라면 중공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 안보를 침해한 러시아를 규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중공이 그렇게 한다면 러시아를 자극할 수밖에 없다.

현재 중공은 국제적으로 전례 없이 고립된 상태여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려 애쓰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인 4일 중·러는 정상회담을 갖고 에너지·금융을 포함한 15개 분야의 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푸틴이 돌연 우크라이나 동부 두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파병을 하자 중공은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 안보와 관련된 중대한 원칙을 고수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둘, 푸틴의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와 비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푸틴 대통령은 21일 대국민 TV연설을 1시간 가까이 했다.

푸틴은 “소련 시절의 일은 더 이상 바꿀 수 없지만 그런 일들은 솔직히 말해야 한다”면서 “우크라이나는 우리에게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님을 강조하려 한다. 이는 우리 역사, 문화, 정신적 공간의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다”라고 했다.

“현대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 더 정확히 말하면 볼셰비키 공산주의 러시아가 만든 것이다. …이 과정은 사실상 1917년 (사회주의)혁명 이후 곧바로 시작됐다. 레닌과 그의 일당은 러시아의 역사적인 영토 일부를 분리하고 떼어주는, 러시아에는 아주 거친 방식으로 이 과정을 추진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에 속해 있던 일부 영토를 우크라이나에 넘겼고, 1954년에는 흐루쇼프가 모종의 이유로 러시아로부터 크림반도를 떼어내 우크라이나에 선물했다. …실제 우크라이나 영토는 이렇게 형성됐다.”

푸틴 대통령은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주요 임무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것, 정확히 말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소련 공산당 지도부가 몇 차례에 걸쳐 국가 건설과 경제 및 국가 정책상에서 범한 역사적·전략적 착오로 인해 우리의 통일된 국가가 해체됐다.”

이로 볼 때, 소련에서 레닌·스탈린·흐루쇼프가 공산주의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없다는 것이 푸틴의 생각이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2017년 10월 31일, 푸틴 대통령은 구소련 시절 정치탄압 희생자들을 기리는 조형물 ‘슬픔의 벽(Wall of Sorrow)’ 제막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우리와 우리의 후대는 우리 역사상 탄압의 비극과 그것을 야기한 원인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노동자, 농민, 엔지니어, 장교, 종교계 인사, 국가 공직자, 학자, 문화계 인사 등 각계각층의 국민이 모진 박해를 받았다. 대숙청으로 인해, 조국에 기여한 사람도 조국에 무한한 충성을 바친 사람도 예외 없이 날조된 황당한 죄목으로 고발당할 수 있었다. 수백만 명이 ‘인민의 적’으로 고발돼 총살당하거나 감옥과 강제 수용소, 유배지에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 끔찍한 과거는 민족의 기억에서 지워질 수도 없고 어떤 방식으로도, 특히 인민의 최고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정치탄압은 우리 모두에게, 사회 전반에 걸쳐 비극이며, 우리 인민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탄압의 후과를 감당하고 있다. 우리의 의무는 (역사상의 과오를) 잊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고, 기억하고, 심판하라. 그다음에야 용서할 수 있다’는 나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스베틀로바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푸틴이 러시아 국민들에게 “알고, 기억하고, 심판하라”고 요구한 소련 공산당의 범행은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래 중국 인민에게 저지른 일이자 중국 공산당이 백방으로 중국 인민들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일이다.

푸틴은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는 푸틴과 손잡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중공의 환상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셋,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중공은 정권 수립 초기 상황이 녹록지 않아 소련의 원조에 크게 의존했다. 중국과 소련의 밀월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대립으로 돌아섰다. 1969년 소련은 중공에 외과수술식 핵타격을 가할 뻔했다.

1969년 8월 20일,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는 워싱턴에서 헨리 키신저 미 국가안보보좌관을 긴급히 만나 중국에 대한 소련의 핵공격 의사를 통보하고 미국 측 의견을 구했다. 미국은 이에 반대하는 한편, 이 소식을 언론에 흘렸다.

1969년 8월 28일, 워싱턴스타(The Washington Star, 1982년에 워싱턴포스트에 인수됨)는 ‘소련, 중국에 대한 외과수술식 핵타격 계획’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신문은 “믿을 만한 소식에 따르면, 소련은 수백만 톤의 핵탄두를 탑재한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동원해 중국의 주취안(酒泉)·시창(西昌)발사기지·뤄부포(羅布泊)핵실험기지 등 중요 군사기지와 베이징(北京)·창춘(長春)·안산(安山) 등 주요 공업도시에 외과수술식 핵타격을 가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소련은 어쩔 수 없이 핵타격 계획을 취소했다.

1969년 9월 16일, 런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가 소련 KGB의 고위급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소련 언론인 빅토르 루이스(Victor Louis)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기고문은 “소련이 중국 신장 뤄부포 핵실험기지를 공습할 수 있다”고 전했다. 소련이 중국에 외과수술식 핵타격을 가할 것이라는 먹구름이 또다시 중국을 뒤덮었다.

미국은 소련의 핵타격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밝혔다. 미국은 또 소련이 이미 해독한 통신 전보 코드로 ‘소련이 중국에 핵 공격을 가하면 소련의 134개 전략 목표를 향해 동시에 핵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이 소련에 역정보를 흘린 것이다. 소련은 또다시 핵 타격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이후 중공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979년 1월 덩샤오핑(鄧小平)은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난 수십 년을 돌아보면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 온 나라들은 모두 부유해졌다”고 했다. 덩샤오핑은 그때부써 미·중 관계 발전을 중공 외교의 최우선 순위에 뒀다.

중공은 미·중이 수교한 40여 년 동안 미국의 자금·기술·인재·시장·서비스 등에 기대, 문화대혁명으로 국민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른 곤경에서 벗어나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중 관계는 수교 40여 년 만에 최악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중공의 공격적인 ‘전랑(戰狼·늑대전사) 외교’의 영향으로 중공과 일본·인도·호주·캐나다·리투아니아 등 많은 국가들의 관계가 크게 악화됐다. 중공은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고 미국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푸틴은 중공과 전혀 같은 편이 아니고, 중공을 이용해 이익 극대화를 노릴 뿐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에도 중공이 러시아 편에 선다면 미국을 비롯한 전체 자유세계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맺음말

중공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딜레마에 빠졌다. 이 때문에 중공은 외교적 장소에서 애매모호한 말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자면 “중국은 우크라이나의 최신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양측은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자제해야 한다” “양측은 대화와 협상 노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등이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동부 두 공화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상황에서 중공은 이 세 가지 중대한 원칙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중공은 미·러 사이에서 양쪽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자신의 실체를 충분히 드러내고 말았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