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中 공산당 역사결의는 권력독점 위한 판 뒤집기

청샤오눙(程曉農)
2021년 12월 6일 오후 1:43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12

중국 공산당(중공) 역사상 여러 유형의 문건이 있지만, ‘역사결의’라고 불리는 문건은 매우 희소하다. 이는 이 문건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런 역사결의를 채택할 때마다 판이 뒤집히는 결과가 따랐다.

1981년 첫 번째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청산하고 공산당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고, 이번 역사결의를 통해서는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노선을 청산하고 시진핑 시대를 열었다. 어째서 이러한 판 뒤집기가 나오는 것일까?

‘역사결의’는 판 뒤집기를 강제적으로 추인하는 절차

중공은 창당 이래 지금까지 총 3번의 ‘역사결의’를 내놓았다. 첫 번째는 1945년 6기 7중전회에서 채택한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이고, 두 번째는 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 채택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최근에 채택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이다.

이러한 역사결의는 모두 판 뒤집기를 강제적으로 추인하는 것으로, 판 뒤집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을 선언하는 것이다. 중공의 역사결의는 모두 추진한 자, 즉 판을 뒤엎은 자의 이른바 ‘승리 선언’이었다. 이를 강제적 추인이라 하는 이유는 중공이 이 결의를 통해 승자에게 복종해야 하고 불평하거나 딴생각을 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모든 중공 관리에게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국가의 당내 정치에서는 자주 판이 뒤집힌다. 소련이 그랬고 중공도 그랬다. 그러나 판을 뒤엎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공산당 내의 판 뒤집기는 언제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지 공산당의 통치 자체를 뒤집기 위함이 아니다. 따라서 판 뒤집기는 판 깨기가 아니다. 판 뒤집기는 주로 국내 정치, 경제 정책, 국제관계 등 세 분야에서 일어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중공이 경제 분야에서 판 뒤집기를 하려면 선택할 수 있는 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뒤엎을 뿐이다. 국내 정치 분야에서 판 뒤집기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개인독재체제와 집단지도체제, 이 양단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이렇게 오갈 때마다 한 번씩 판이 뒤집히는 것이다.

국제 관계 분야에서의 판 뒤집기도 한계가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미·중·러 3대 강국 간의 관계를 재편하는 것이지만, 선택지는 미국과 잘 지내든지 척지든지 두 가지뿐이다. 중공은 미국과 척지면 한국전쟁 때처럼 러시아에 붙을 것이고, 러시아와 척지면 미국에 붙을 것이다. 이것이 중공이 미국과 수교한 이유이다. 현재 중공은 미국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지만, 바이든 당국은 아직은 중공과 척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공이 판 뒤집기를 할 때마다 ‘역사결의’를 내놓은 것은 아니다. 일부 판 뒤집기는 중공이 어쩔 수 없이 했고, 또 자신들이 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판을 뒤엎은 뒤 과거를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에포크타임스에 기고한 ‘독재 굳히기냐 지도부 교체냐 쿠데타냐…내년 中 공산당 20차 당대회 전망’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중공은 개혁개방 전후의 ‘두 개의 30년’이 상호 대립하고 부정하는 데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고 했다. 이 ‘두 개의 30년’ 중 전(前) 30년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판을 뒤엎었고, 후 30년은 다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판을 뒤엎었다.

그 외에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중국과 소련이 사이가 나빠지고 중국과 미국이 가까워진 것도 국제 관계 방면의 판 뒤집기에 해당한다.

첫 번째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 시대’로 진입

중공은 1945년 첫 번째 ‘역사결의’를 채택할 때만 해도 옌안(延安)의 동굴 안에 숨어 있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이었고 중공은 ​​여전히 항일(抗日)을 기치로 내걸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기본적으로 일본군과의 전투를 중단한 상태였고 심지어 화둥(華東)지역에서 일본 침략자들과 결탁하기까지 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는 중국 대표로 카이로에서 미국과 영국 정상을 만나 항일전쟁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논의했다. 따라서 1945년의 중공의 첫 번째 ‘역사결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당시 중국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당시의 역사결의는 소련 정부의 요구에 따라 지금부터 ‘촌뜨기’ 마오쩌둥이 소련의 지지를 받는 중공 지도자라고 중공 내부에 선포하는 것이었다. 소련 공산당을 따르는 중공 친소파(親蘇派)는 소련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이 결의는 또한 소련의 지지를 받고 소련에서 훈련받은 데다 러시아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전의 중공 고위 간부들이 소련 정부의 총애를 잃었고 마오쩌둥이 그들을 대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 중공은 이 결의를 매우 중시하고 이를 중공 역사의 전환점으로 간주한다. 당시는 비록 옌안 동굴 안의 ‘천하’에 불과했지만, 이때부터 마오쩌둥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1949년, 중공은 소련의 지지와 무기 지원뿐 아니라 미국 국무부의 몇몇 친공(親共) 외교관의 지원까지 받아 내전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에 접어들었다. 즉, 마오쩌둥 재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오쩌둥의 재앙은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에만 해를 끼친 게 아니다. 그 화는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고, 또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치고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반란이론이 미국과 유럽의 많은 급진좌파 청년들까지 크게 매료시켰으며, 그 시대의 마오쩌둥 추종자들이 서구 문명에까지 영향을 미쳐 오늘날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서 좌파 재앙이 판치게 했다.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에 남긴 그의 경제제도 유산은 일부 뒤집혔지만, 서구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미국 민주당 급진파 리더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를 비롯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추종자가 현재 지도자이거나 이전의 지도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옌안 동굴의 ‘역사결의’는 이후의 중국과 세계에 줄곧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역사결의, 마오쩌둥 노선을 청산…공산당 자본주의 시작

중공이 내놓은 두 번째 ‘역사결의’도 당내 정치를 뒤엎는 것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개인숭배를 계속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화궈펑은 경력이 일천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살아남은 마오쩌둥 세대 원로들이 마오쩌둥에게 잃었던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다시 뺏어오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 마침내 원로들은 마오쩌둥 추종자를 모두 내쫓고 권력을 다시 잡았다.

1981년의 두 번째 역사결의는 사실상 중공이 마오쩌둥 시대와 마오쩌둥 정책을 청산하는 ‘승리 선언’이었다. 당시의 판 뒤집기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시대에서 벗어나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세 사람의 시대는 사실 ‘공산당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개념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필자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필자는 몇 년 전에 이에 관한 칼럼을 중국어와 영어로 발표한 바 있다. 그중 중국어 칼럼은 ‘중국 모델: 공산당 자본주의’라는 제목으로 2016년 6월 22일 자 ‘휴먼라이츠인차이나(HRIC)’에 실렸다.

당시 필자는 홍색정권이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결혼’하고 공산당 관리들이 버젓이 자본가가 되면서 사회주의도, 민주자본주의도 아닌, 공산당 자본주의라는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독특한 정치경제제도 구조가 생겨났다고 기술했다. 중공은 이런 제도를 이용해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려 했으나, 결국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

개혁개방 이후 중공의 공산당 자본주의는 3개 역사적 단계를 거쳤다.

첫 번째 단계는 1997부터 2002년까지로, 국유기업의 전면적인 사유화 과정에서 많은 공산당 관리가 자본가로 변신했다. 두 번째 단계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로, 홍색 사업가들이 목숨을 걸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막대한 자산을 축적한 뒤 미국 등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공산당 정권의 곳간을 터는 데 매우 열중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2013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이다.

시진핑은 집권 후 내부 상황을 많이 알게 되면서 공산당 경제가 발효할 ‘큰 술통’이 거의 다 비워지고 관리들의 가족들도 거의 다 외국인이 돼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홍색정권이 조만간 위태로워질 것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마침 고위급 권력투쟁 과정에서 자신의 정적들이 심각하게 부패한 사실을 안 시진핑은 왕치산(王岐山)을 총으로 삼아 반(反)부패 명목으로 고위급과 중급 관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그 결과 아무도 거역 못 할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원죄…공산당 스스로 무덤을 파다

마르크스는 중대한 실수를 두 가지 저질렀다. 이 두 가지 실수를 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가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이 입증됐고, 중공은 이를 증명하는데 ‘중대한 역사적 기여’를 했다.

마르크스의 첫 번째 실수는 세상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완전히 대립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산당의 시조는 완전히 틀렸다. 역사는 중공의 공산당 자본주의 제도가 이 두 가지 상반된 제도를 ‘접목’해 하나로 합쳤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필자는 만약 마르크스가 어느 날 무덤에서 기어 나온다면, 이 현실에 화가 나서 죽거나 ‘시대의 흐름에 맞춰’ 중난하이가 그에게 부여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칭호를 거부한다고 선언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마르크스의 두 번째 실수는 공산당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이고,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은 그의 이론을 완전히 뒤집었다. 중공의 탐관오리들은 공산당 자본가들이 진정으로 의지하고 싶은 것은 사회주의 중국이 아닌 미국의 자본주의임을 행동과 부패의 ‘성과’로 증명했다. 따라서 중국의 이 홍색 자본가들은 절대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며, 오히려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중공은 이제 마르크스를 ‘위로’할 수 있게 됐다. ‘공산당 정권하에서는 무덤을 파는 사람은 한 종류뿐이고, 그들은 분명 공산당원들이며, 그들이 판 것은 공산당의 통치를 매장하기 위한 함정일 것’이라고 말이다.

덩샤오핑 시대부터 장쩌민 시대와 후진타오 시대까지 중공 탐관오리들은 끈질기게 손과 발로 ‘투표’하며 미국 자본주의를 뜨겁게 껴안았다. 그들이 손으로 하는 ‘투표’는 수조 달러의 자산을 미국 및 역외금융센터의 작은 섬나라로 옮기는 것이고, 발로하는 투표는 가족들을 위해 미국에 집을 사고 영주권을 얻는 것이다.

시진핑이 집권한 후 부패 척결을 하지 않았다면 2013년부터 지금까지 중공 탐관오리들은 중공 정권을 거의 다 털어먹었을 것이다. 탐관오리들은 공산당 독재제도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이 제도가 청산될까 두려워 미국 자본주의를 껴안는 것이다.

중국의 시장경제는 당국이 통제하므로 경제활동에 개입할 수 있는 관리라면 누구나 부패를 저지를 기회가 있다. 그러므로 전국(全國)이 부패하고 전당(全黨)이 부패한 것이 장쩌민·후진타오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공산당 관리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통치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무리 또 한 무리,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관리들이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가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무덤을 파는 대군이 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전에 중국공산당의 통치 상황을 술을 담는 큰 나무통으로 비유한 바 있다. 관리들은 이 술통의 나무판자인데도 술이 쉴 새 없이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스스로 나무판자에 수많은 구멍을 뚫어 술이 밖(해외)으로 흘러나가게 한다.

덩·장·후 노선을 청산한 시진핑, 공산당 구할까?

이번 세 번째 역사결의도 물론 정치적 판 뒤집기의 산물이며, 그 결과는 시진핑 시대의 시작이다. 시진핑은 집권 초기에 장쩌민 시대에서 넘어온 고위층 각 계파의 압력에 시달렸다. 특히 군대와 경찰(국가안전부의 비밀경찰 포함)은 시진핑에게 불복종하고 심지어 반항하기까지 했다.

시진핑은 몇 년에 걸쳐 반부패를 수단으로 수많은 정적을 잡아들였고 군 지휘체계를 전반적으로 재편했고, 공안부와 국가안전부를 정돈한 끝에 몇 년 전에야 대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시진핑은 집권 첫 10년 동안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시대의 관리들을 대거 청소했고, 적어도 겉으로는 숙청된 관리들을 무릎 꿇게 했다.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시대의 고위층 집단지도 모델이 종식됐고, 공산당 고위층 통치자의 ‘시계추’는 다시 개인 독재로 되돌아갔다.

이번에 독재자의 성이 ‘시(習)’로 바뀐 것이다. 이제서야 시진핑은 명실상부하게 다른 고위층 관리들의 일언일행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중공은 비로소 시진핑 시대에 들어섰고, 중국도 시진핑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시진핑은 여전히 다양한 정책 조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한다. 국내 정치에서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잘못을 부정하고 비판한 데 대한 반발을 무마하는 한편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시대의 부패한 정치와 매관매직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또한 정치적 강압을 기본 수단으로 삼아 당 내부와 일반 민중이 ‘당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하게 하는’ 마오쩌둥식 통치를 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경기 하강 추세에 맞춰 민간기업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경제 자원을 총동원해 경기 하강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한편, 군비를 확충해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공산당의 무덤을 파는 대군은 사라졌을까? 마오쩌둥의 말을 빌린다면 “(적의) 몸은 여전히 당내에 있고, 마음도 죽지 않았다”는 그런 상황이다. 이미 돈을 벌어 해외로 이전한 자들은 돈을 찾을 수 없다. 여권도 압수당하고 세관 출국 제한 명단에도 올라 있어 도망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직 돈을 벌지 못한 자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은근히 쿠데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고, 시진핑이 병들기를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시진핑 통치의 정치적 ‘기반’이다. 부패 심리가 영원히 꿈틀대는 이 거대한 관료들에 대한 시진핑의 유일한 대안은 정치적 강압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만세(萬歲)’를 살 수 없었고, 시진핑 또한 ‘만세’를 살 수 없다. 이것이 이들 관료의 ‘희망’이다.

시진핑이 공산당을 구할 수 있을까? 결국 모두가 마르크스에게 속았다. 공산당은 마르크스의 속임수에 따라 무산계급 기치를 내걸고 정권을 탈취했으나, 대대손손 무산계급이 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유산계급이 되고 싶지만, 공산당 정권의 곳간을 터는 것 외에 부를 빨리 축적할 길이 없다. 그 속에서 나타난 역사 법칙을 시진핑은 이해하지 못한다. 공산당의 마지막 지도자 중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감히 그것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