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류의 중독으로부터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회화작품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에릭 베스(Eric Bess)
2020년 04월 15일 오전 10:16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5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방면에서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중독과 싸우는 사람들 역시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한동안 미국은 오피오이드 중독과의 전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었다. 지금 이들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더는 중독 치유모임에 참석할 수도 없고 운동하러 체육관에 갈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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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명상과 미술을 통한 치유를 선택할 수 있다. 미술 작품을 통한 치유와 극복을 찾는 이들에게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죽음과 구두’가 적합하다. 이 작품은 모든 유형의 중독에 저항할 수 있는 통찰력과 용기를 줄 수 있다.

보스와 성모의 형제단

히에로니무스 보스(약 1450~1516년경)의 삶은 대체로 신비에 싸여 있지만,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종교 모임인 ‘성모의 빛나는 형제단(the Illustrious Brotherhood of Our Lady)’의 일원이었다.

1318년 창설된 ‘성모의 빛나는 형제단’은 2018년 창립 700주년을 맞았다. 이들은 현대적 발전과 그에 따른 문제점을 고려하면서 오래된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을 돌보고, 기독교 결속과 형제애적 유대관계를 증진하는 사명을 가진 유대-기독교 비밀조직의 일종이다.

보스는 ‘성모의 빛나는 형제단’의 일원으로서 인간의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경고하는 도덕적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의 그림 몇 점은 ‘아르스 모리엔디(As Moriendi)’ 또는 ‘죽음의 기술(The Art of Dying)’이라고 불렸던 중세의 책에 의해 알려졌다. 이 책은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죽음과 직면해야 했던 서구인들에게 ‘죽음에 대한 안내서’ 역할을 했던 소책자로 15세기에 널리 알려졌다.

짧은 버전의 ‘아르스 모리엔디’는 10개의 이미지를 2개씩 대조해 보여준다. 한쪽 그림에는 악마가 다섯 가지 유혹 중 하나를 이용해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데려가려는 장면이 묘사돼있다. 이 다섯 가지 유혹은 불륜, 절망, 조바심, 영적 자부심, 탐욕 등이다. 다른 쪽 그림에는 유혹에 대한 적절한 대응법이 묘사돼있다.

‘아르스 모리엔디’에 실린 그림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싸움을 보여주고 죽음의 이면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돕는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죽음과 구두쇠(Death and the Miser)’, 약 1485~1490년경, 워싱턴 국립미술관.|Public Domain

‘죽음과 구두쇠’

보스는 그림 ‘죽음과 구두쇠’에서 다섯 번째 유혹인 ‘탐욕’을 보여준다.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는 한 구두쇠가 침대에 누워있다. 천사는 그의 뒤에 앉아 유혹의 너머와 그 위를 바라보라고 재촉하고 있다. 마귀는 침대 한쪽에서 그에게 돈주머니를 내밀고 있다.

구두쇠는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도 올려다보지도 않는 것 같다. 대신 돈주머니를 잡으려고 손을 뻗으며 문을 통해 살금살금 들어오는 ‘죽음’을 보고 있다. ‘죽음’은 한 손에 화살을 든 채 노인의 목숨을 가져갈 채비를 하고 있다.

그림의 아랫부분에는 구두쇠의 죽기 전 모습이 묘사돼 있다. 구두쇠는 악마가 열어준 주머니에 돈을 모아두고 있다. 그의 손에는 묵주가 허리에는 열쇠가 매달려 있다. 묵주는 그의 영적 믿음을 위한 것이고 열쇠는 그가 돈을 모아두는 궤를 잠그기 위한 것이다.

‘초기 네덜란드 회화(Early Netherlandish Painting)’의 저자인 존 올리버 핸드(John Oliver Hand)와 마사 울프(Martha Wolff)는 궤 아래에 있는 쥐 형상의 악마가 들고 있는 종이들이 재무 문서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두쇠가 탐욕에 빠져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유혹을 더 깊게 바라보다

보스는 탐욕에 빠진 구두쇠의 영혼을 둘러싼 싸움을 묘사했다. 구두쇠에게 고개를 들어 보라고 재촉하는 천사는 유혹에 대한 적절한 대응법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지상의 유혹은 덧없고 일시적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난다. 이 죽어가는 구두쇠는 쌓아 둔 돈을 죽음 너머로 가져갈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돈과 재물을 내려놓고 세속적인 유혹을 넘어 나아가야 한다. 구두쇠는 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돈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이 질문은 나를 유혹의 더 깊은 본질에 대한 통찰로 이끌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 돈의 유혹이 아니라 중독이다. 유혹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는 돈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제 중독이 되어 그를 지배하고 있다.

구두쇠의 돈에 대한 중독은 모든 중독과 마찬가지로 비이성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사의 격려를 무시하게 만들고 원하지 않는 파괴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그를 압도한다. 중독은 우리가 자아를 얼마나 가치 있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아마도 구두쇠는 자신의 불안과 부족함을 보상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가치 있다고 느끼거나 삶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것들에 중독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고 살펴보는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 많은 사람은 종교적 또는 영적 수련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자아를 발견하고자 한다. 구두쇠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묵주는 그가 자신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진정 영적인 사람인가?

구두쇠가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돈에 대한 집착과 중독은 그가 버리고 내려놓는 것을 방해한다. 보스는 구두쇠를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쫓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는 묵주와 돈을 모두 쥐고 있다.

그렇다, 구두쇠는 돈에 대한 욕심과 영적인 욕심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는 두 세계 모두에서 최고의 것을 원한다. 그것이 가능한 걸일까?

그의 탐욕은 대부분의 중독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그를 만족시키지도 보상을 주지도 않을 것이며 결국 그의 인생을 파멸시킬 것이다.

보스는 우리에게 중독과 영성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는 세속적인 중독에 빠진 채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중독은 영적으로 의로운 삶을 사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할 뿐이다. 위를 가리키는 천사는 중독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가 강해질 때 영성 역시 깊어질 것임을 일깨워 주는 격려의 메시지다. 결국, 잘 죽는 기술은 잘 사는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인 거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나와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