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좋은 것들은 다 정원 안에 있다”

궁극적 욕망에 대한 은유

제임스 세일
2020년 11월 26일 오후 10:10 업데이트: 2020년 12월 16일 오전 9:01

좋은 은유는 좋은 이해를 낳는다.

서양의 지성과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의 달인이 되는 건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은유는 비(非)유사성에서 유사성을 찾아내는 관찰자의 직관을 드러낸다. 이는 천재성의 표시다.”

시인들, 뛰어난 작가들은 서로 닮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닮은 점을 뽑아내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재능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높게 평가하고, 그들은 우리들에게 현실을 꿰뚫는 새롭고 다채로운 방식을 풀어놓는다.

은유는 현실을 수사학적이면서 개념적인 지도로 그려내려는 시도다. 사물에 의미를 담는 일이다.

어떤 은유는 인간의 사고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도록 돕기에, 오랜 세월에 걸쳐 중요한 상징으로 인정받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원(garden)이다.

정원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낙원에 대한 은유다. 얀 브뤼겔(Jan Brueghel)의 ‘낙원(Paradise)’. 베를린 국립미술관 게멜데갈레리 | 퍼블릭 도메인

정원의 상징과 은유

정원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은유다.

제우스가 헤라와 결혼한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서부터 불교의 서방정토, 선종의 고산수정원 그리고 에덴동산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종교에서 우리는 정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옛 속담에 “남자가 일주일의 행복을 원한다면 아내를 데려가야 하고, 한 달간 행복하길 원하면 돼지를 잡아야 하지만,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정원을 가꿔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잠시 왜 남자와 아내인지는 접어두자. 실은 반대로 바꿔도 뜻은 마찬가지다. 이 속담의 요점은 정원은 흔히 낙원으로 표현되는 지극히 행복한 상태를 곧잘 나타낸다는 점이다.

시작 그리고 우리의 최종 목표

서양문명의 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곳에서도 역시 정원을 찾을 수 있다. 에덴동산.

모든 것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은 원래 각종 나무와 꽃, 약초가 자라는 안전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그 자체의 풍요로움과 화려함 속에서 번창했고, 모든 동물은 인간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인간에 의해 이름 지어졌고 안전을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낙원에서, 서양문명은 시작했다.

토마스 콜(Thomas Cole)의 ‘에덴동산’ 아몬 카터 미국 미술관. | 퍼블릭 도메인

정원은 황무지나 혼돈, 또는 위험과 변화무쌍함이 아닌,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체계적인, 삶의 의미가 있는 평화로운 장소를 의미한다.

정원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의미 중 평화는 매우 중요한 단어다. 왜냐하면, 우리가 쏟아붓는 모든 노력과 헌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마음의 평화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충분한 돈, 권력, 지식이 있다면 안정감을 느낄 것이고 마음의 평화 또한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진정한 영적 전통들은 돈과 권력, 지식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점령하고 영혼마저 가두어 파괴한다.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걸작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을 보라.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지적 호기심과 세속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박사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고 그는 최후에 낙원과는 아주 먼 지옥으로 떨어졌다.

수많은 영적 수행과 전통들은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열반의 세계 또는 천국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동의하든 안 하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가 있어야 할 이상적인 곳이 아님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원’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무신론자들과 계몽주의 사상가들 역시 같은 생각이다. 프랑스 계몽주의 대표적 사상가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Candide)>의 마지막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One must cultivate one’s own garden)”는 강한 권고로 끝냈다.

현대적인 접근

20세기 초, 작가 제임스 앨런은 그의 저서 <위대한 생각의 힘>에서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정원과 같아 지혜롭게 경작될 수도 있고 거친 황무지가 되도록 방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작되든 방치되든 그 땅은 생명을 육성할 것이다. 유용한 씨앗이 심어지지 않으면, 어디선가 쓸모없는 잡초 씨가 날아와 그 종자를 계속 생산할 것이다.”

제임스 앨런은 마음을 무언가를 심고 가꿀 수 있는 터전으로 생각했다.| 책표지

동산에서 쫓겨난 후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갖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발견했다.

여기서 우리는 동산에서의 쫓겨남이 유대교나 기독교만의 은유가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모든 진정한 종교는 이를 은유하는 독자적인 나레이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의 진정한 운명이라고 믿고 있다.

귀스타브 도레의 <귀스타브 도레 판화성서> 중 ‘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The Expulsion of Adam and Eve from Paradise)’ | PD-US

사실,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어원학적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낙원에 도달하도록 자신을 묶어놓거나 단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인간은 정원으로,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낙원에 도달하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의 평화 대신,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무성한 잡초와 가시가 넘치는 황무지를 더 쉽게 발견하곤 한다.

정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갈로 강을 표현한 일본의 젠정원 | CC BY-SA 3.0

지상의 낙원

태초의 쫓겨남 이후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스스로를 느낄 수 있는 진짜 정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의 끝에서도 낙원에 대한 우리의 그리움과 갈망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뒤돌아보며, 그간 그들의 행복한 거처였던 동쪽의 낙원을 바라보았다. 불타는 칼이 그 위에서 빛나고 있었고, 문에는 무서운 얼굴들과 불을 휘감은 무기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눈물이 흘렀지만, 곧 닦아냈다.”

우리는 단테의 <신곡>에서도 지상 낙원이 연옥의 산 정상에 중요한 출구로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찾을 수 있다.

단테가 그의 책 ‘신곡’을 들고 있다. 그의 왼쪽으로는 지옥의 입구가 있고 뒤쪽에는 7층으로 이루어진 연옥의 산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그의 고향 피렌체가 있다. 1465년 도메니코 미 미첼리노. 이탈리아의 세인트 메리 대성당 |퍼블릭 도메인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들의 사후를 위한 엘리시안이라는 낙원을 갖고 있었고, 고대 이집트 설화에서는 낙원을 갈대밭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생명이 경작되고 자라는 목적이 있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가 이 땅에 에덴동산을 재창조하고자 해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준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설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나 18세기 영국 조경 건축가 ‘케이퍼빌리티’ 브라운의 걸작으로 꼽히는 블레넘 궁전의 말보로 메이즈 역시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영국 조경 건축가 케이퍼빌리티 브라운의 걸작으로 꼽히는 블레넘 궁전의 말보로 메이즈. | DECAN CC BY-SA 3.0
많은 통치자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프랑스 베르사유 정원의 오랑제리 정원. 2005년. | CC BY-SA 3.0

여기서 다시 작가 제임스 앨런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사람의 마음은 정원과 같다”는 그의 말을 깊이 음미해 보면 우리가 원하는 진짜 평온한 정원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무엇인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예술이다. 은유적으로 답해본다면 “위대한 예술은 색과 소리와 언어가 정원이 되는 것”이다. 생각, 감정, 정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정원을 위대한 예술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술은 정확한 계산과 절제와 목적이 내포돼 있다. 그래서 색상에는 패턴이 있고 소리에는 하모니가 있으며 언어에는 규칙과 체계가 있다.

만약 백만 마리 원숭이에게 백만 대의 타자기를 주고 그것을 두드리도록 백만 년 동안 기다린다고 해보자.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고 해도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견줄 만한 글은 단 한 페이지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혼돈과 무작위성이 점점 더 증가하는 오늘날이지만, 마음 안에 정원을 가꿀 수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은 결코 그 혼돈과 무작위성 속에서 헤매지 않는다.

인류는 끝없이 구하고 찾는 삶 속에서 지나치게 바빠져 위대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표식을 놓치고 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예술가, 작곡가, 시인에게 진정 위대한 예술을 요구하고 싶다.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인류는 지치고 고단해진 정신과 마음을 눕히고 쉬이고 새 힘을 얻으며 인류가 잃어버렸던 낙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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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세일은 영국의 사업가로, 그의 회사 모티베이셔널 맵스(Motivational Maps Ltd.)는 전 세계 14개국에서 운영되고 있다. 그는 맥밀런, 피어슨, 루트리지 등 주요한 국제 출판사에서 경영과 교육에 관한 40여 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다. 또한 ‘고전시인협회 2017’ 대상의 영광에 빛나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