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재 여파로 한국 기업들 비상…정부, 대책 마련에 부심

이윤정
2022년 03월 6일 오후 5:44 업데이트: 2022년 03월 6일 오후 6:40

러, SWIFT서 퇴출…국내기업 “수출대금 못 받을라” 발 동동
정부, 2조 원 긴급금융지원·대출 만기 연장
美 FDPR 적용 제외됐지만, 제재 관련 상시 모니터링 필수
한국도 대러 제재 동참…‘뒷북 대응’ 논란에 청와대 반박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가 러시아 제재에 나선 가운데 우리나라 경제도 직·간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와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이틀 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로 일부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배제했다.

국제사회의 잇따른 대(對) 러시아제재 여파로 국내 수출 기업과 러시아 현지 진출 기업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어 정부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본격화하면서 정부는 2월 24일, 수출통제 전담 상담창구인 ‘러시아 데스크’ 운영을 개시했다. | 연합

러시아 SWIFT 퇴출…수출 대금 결제 문의 쇄도

러시아가 SWIFT에서 퇴출되면서 우리 수출 기업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수출 대금을 못 받을 수도 있어서다. SWIFT는 전 세계 금융기관이 안전한 금융 거래·결제 등을 위해 쓰는 은행 공동 전산망이다. 전 세계 금융기관 1만여 개가 이용 중인 SWIFT에서 퇴출된다는 것은 세계 금융 시장과 무역 거래에서 사실상 차단된다는 의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對)러시아 수출 규모는 99억8300만 달러(약 12조 원)로, 전체 수출의 1.6%를 차지한다. 러시아 SWIFT 퇴출로 인해 우리 기업이 러시아에서 받아야 할 수출 대금 12조 원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로 피해를 호소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3월 3일, “수출통제·대금결제 등과 관련한 문의 및 애로사항 접수가 400건을 넘어서는 등 우크라이나 사태 영향이 가시화되는 조짐”이라고 진단했다.

한국무역협회도 3월 4일, “우크라이나 사태 긴급 대책반이 2월 24일~3월 3일까지 8일간 접수한 애로사항은 204개 업체, 302건”이라며 “이 중 대금결제 문제가 170건(56.2%)으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환율 상승으로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한 데다 외화 송금 제재까지 겹치면서 대금 지급 거부, 주문 생산품 인수 거부, 추가 주문 취소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글로벌 주요 해운선사들이 러시아 노선 예약과 러시아 항구에서의 해운 업무 등을 속속 중단하면서 수출 기업의 물류비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수출 기업 중 한 곳은 베트남 공장에서 선적 후 호치민-러시아 항해 중 물류 봉쇄로 인해 강제 하역을 하든 배를 돌리든 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고 무역협회는 전했다.

러시아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현대차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은 최근 글로벌 물류난으로 부품 수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지난 3월 1~5일 가동을 중단했다. 해당 공장은 2010년 준공 이래 연간 약 23만 대를 생산하고 있다. 쌍용차도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등지에서 부품을 공급받고 있어 사태 장기화로 국경이 폐쇄될 경우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폐허로 변한 우크라이나 키이우 아파트 단지 | 연합

정부, 긴급금융지원·대출 만기 연장

이에 정부는 대(對)러시아 제재로 피해를 본 기업에 2조 원 규모의 긴급금융지원을 시행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3월 4일, “지원 대상·요건 및 내용을 구체화해서 피해 발생 즉시 시행할 예정”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수출입 기업 및 현지 기업을 대상으로 △선적 전 수출신용보증 보증한도 감액 없이 연장 △단기수출보험 보험금 신속 지급 △국외기업 신용조사 수수료 최대 5건 면제 △수출입·법무·회계 등 일대일 맞춤형 컨설팅 제공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백금·알루미늄 등 수급 리스크가 커진 원자재 수입에 필요한 금융지원도 강화할 방침이다.

아울러 4월 말로 종료 예정인 유류세 20% 인하 적용을 오는 7월 말까지 연장하고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라 피해를 봤거나 피해를 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소기업에 대해 만기 연장 등 특별 상환유예 조치를 시행하기로 했다.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길어질 경우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교역하는 중소기업뿐 아니라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 등에 따라 중소기업 전반의 경영 여건이 영향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억원 기획재정부 1차관은 지난 3일 제10차 우크라이나 사태 비상 대응 태스크포스(TF)회의에서 “주요 수출통제·금융제재가 본격적으로 발효되면 수출·금융·에너지·공급망 분야 외에도 중소기업·해외건설·정보통신(ICT)·해양수산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예상하지 못한 파급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러 금융제재 관련 “수시 모니터링 체계 구축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이 대(對)러시아 수출을 통제하기 위해 시행한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Foreign Direct Product Rule)’ 적용 대상에서 휴대전화, 자동차, 세탁기 등 소비재가 제외된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3월 3일, 러시아에 대한 수출통제 공조와 관련해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 협의 과정에서 이 같은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3월 3일, 워싱턴 D.C.에서 미 상무부 돈 그레이브스 부장관과 면담했다. |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FDPR은 미국 밖의 외국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도 제조 과정에서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하는 소프트웨어·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제재 대상 국가로 수출할 수 없도록 하는 제재조항이다.

미국은 미중 갈등 당시 중국 기업 화웨이에 치명적 타격을 주기 위해 화웨이가 대만 TSMC 등 해외 반도체 기업으로부터 반도체 칩 납품을 받지 못하도록 이 규정을 활용한 바 있다. 앞서 미 상무부는 지난달 24일 전자(반도체), 컴퓨터, 통신·정보보안, 센서·레이저, 해양, 항법·항공전자, 항공우주 등 7개 분야 57개 품목·기술을 추가 통제 대상에 포함했다.

당시 한국은 FDPR 적용 제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러시아로 수출해온 반도체, 스마트폰, 전자제품, 자동차 등의 대러 수출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에 소비재를 수출하는 한국 기업들은 일단 한숨을 돌렸지만, 부담감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다.

박효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러시아 SWIFT 퇴출 제재와 관련해 “수시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변호사는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3월 3일, 법무법인 세종과 공동으로 개최한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미국·EU 등의 대(對)러시아 제재 주요 내용과 영향’ 온라인 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특히 금융제재와 관련해 “우리 기업들은 미국이 지정한 제재대상자(SDN) 혹은 SDN 지분을 50% 이상 소유한 기업과의 거래 여부를 항시 체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재 대상자 명단만 보고 주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제재대상자가 보유한 지분까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아울러 이들과의 달러화 거래 여부를 점검해 대안을 마련해야 하고, 제재의 금지 내용 및 예외적으로 허가한 부분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세미나에서는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가 가장 강력한 수준이지만, 그 외 국가들의 대러 제재도 유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조용준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EU, 영국, 일본, 호주의 대러 제재와 관련해 언급했다. 그는 “EU 제재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는 거래 등에 관해 제재 적용 여부 및 효과, 예외 여부 및 특별허가 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며 “러시아의 대응 조치도 진행되는 만큼 급변하는 상황을 계속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대체로 EU와 미국의 일부 제재 조치를 뒤따라가며 제재를 시행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EU와 미국의 제재와 유사하게 대응하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 뒤늦은 제재 동참에 눈총받기도

우리 정부도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국제 사회의 대(對)러시아 수출 통제 등 경제 제재에 동참하기로 했다. 정부는 지난달 28일, 러시아에 대한 전략 물자 수출 차단, 러시아 은행과 거래 중지, 국제 SWIFT 결제망 배제 조치 등 금융제재를 이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에 총 1000만 달러(약 120억 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우리 외교부는 당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독자 제재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가 입장을 바꿨다. 이 과정에서 ‘뒷북 대응’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반박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 2월 25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가 러시아 제재에 머뭇거리다가 기업에 피해를 준다, 뒤늦은 러시아 제재 동참’ 등의 지적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러시아에는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있다. 러시아와 교역도 커지고 있는데 그런 부분을 생각 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수석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라며 “미국과 유럽이 제재하면 우리도 연결돼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참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어 “정부가 고민해야 할 지점들은 여러 부분이 있다. 정부는 기민하게 교민과 기업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준비해 왔다”고 해명했다.

미국 동맹국 가운데 유일하게 대러 제재 동참을 유보해왔던 한국 정부를 향해 미국 전직 관리의 쓴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미 국무부 핵(核)확산금지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마크 피츠패트릭은 2월 26일(현지 시간), 미국의소리(VOA) 방송 인터뷰에서 “한국의 소심하고 미온적인 접근은 솔직히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라며 “한국은 (북한 등) 과거 침략의 피해자로서 과거 대대적인 원조를 받았고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면 그런 도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