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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동·서 문명이 걸어온 길

2013년 01월 3일

지난 12월 2013년 세계순회공연을 시작한 션윈예술단. 이번 투어는 남미의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시작됐다. 대기원DB

 

신세기가 교차하는 시각, 허블우주망원경이 광대한 항성계와 성운을 지나고 폭발한 신성을 지나 우주 변두리에 시선이 닿았다. 거인유골과 난장이의 발견, 초현(超弦)이론, 심령의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지구와 우주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다시 자신을 인식하게 됐다. 여태껏 어느 시대도 지금처럼 물질세계의 진상과 가까워본 적이 없고, 동시에 이렇게 멀어본 적이 없다. 작디작은 지구, 이 속에서 인류의 문명도 위태롭다. 지금이야말로 인류가 지나온 험난한 길을 돌이켜볼 때다. ―편집부

 

문명의 초석

 

기원전 500년 전후, 고대 그리스와 아시아에 석가모니,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聖人)이 출현했다. 조물주(造物主)의 기묘한 배치처럼 이들 성인은 거의 동시에 지구에 나타나 동방문명에 깊은 영향을 준 불가, 도가, 유가를 창립하고 서방문명의 기초인 그리스철학을 닦았다. 또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도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완비된 교리가 있었다. 구약성서 앞 5편인 ‘모세5경’도 이 시기에 편성됐다. 이 시기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우연의 일치’는 깊은 사색을 하기에 충분하다.

 

이들 성인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물질세계 이외에, 하나의 형이상적인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공자는 그걸 하늘이라 여겼고 소크라테스는 정의, 석가모니는 물질 환상 외의 영원한 법이라 했으며, 노자는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도(道)라고 생각했다.

 

산업혁명 전까지 이 신념은 사람이 지구에서 생활하는 정신적 기초였다. 하늘의 도리, 우주의 법칙, 영혼과 영생의 신념을 품고 인류는 휘황한 문명을 일구며 지구에서 수천 년을 살아왔다.

 

고대 동방 국가의 황금열쇠

 

이 수천 년간 얼마나 많은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는가? 고대 이집트, 바빌론, 그리스, 로마, 인도 제국이 하나둘씩 멸망하고 침략자의 문명으로 대체됐다. 고대 동방의 중국 문명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5000년 문명의 맥을 이어오며 오늘까지 생존했다. 신과 인간이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생명 철학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7~9세기 중국은 대당성세(大唐盛世)의 황금기였다. 바다처럼 널리 수용한다는 포용성이 당시의 핵심 가치였다. 북서지방 유목민족의 웅건한 마음과 한족의 풍요로운 정신이 융합된 당나라 시대에는 후세에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예술자원과 불교, 도교 문화가 탄생했다.

 

당나라는 당시 아시아 경제·문화의 중심이었다. 동·서·중앙아시아의 상인은 물론 승려들 또한 장안(長安), 뤄양(洛陽), 터키 등 사방으로 교류하면서 불교와 유교 철학, 한자에서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당나라의 독특한 정신문명을 전파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고 신(神)과 부처(佛)를 공경하는 동방의 문명이 이 시기 당나라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유럽서 일어난 ‘중국열풍’ 100년

 

중국이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진입했을 때 유럽은 십자군 원정을 겪었다. 유럽이 흑사병, 르네상스를 거쳐 중흥이 일어날 즈음 중국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 진입했다. 청 제국은 동방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로 면적 또한 유럽 각국을 합한 것과 같았다.

 

이 시기 동·서방 간 한 차례 기묘한 만남이 있었다.

 

1685년 루이14세가 파견한 수학자 6명 중 5명이 3년 만에 동방제국에 도착했다.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다. 루이14세가 파견한 수학자들은 강희제에게 기하, 천문, 물리를 가르쳤고 강희제는 루이14세를 본떠 중국 첫 번째 황실과학관인 ‘몽양재산학관(蒙養齋算學館)’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번 교류 이후 유럽에서는 100년이란 시간 동안 중국 열풍이 분다.

 

각국의 전도사가 쓴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편지와 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서적을 비롯, 명주와 청화자기, 병풍을 가득 실은 선박이 유럽에 도착했다. 유럽인은 전설 속 동방제국의 풍요로운 문명을 직접 보게 됐다.

 

이후 중국풍이 유럽에 유행처럼 번진다. 프랑스 귀족들은 청화자기를 소유하는 것을 지위와 부의 상징처럼 여기기도 했고, 왕실에서는 청나라에서 온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중국식 살롱에서 사교 모임을 여는 게 유행이 됐다. 대영제국, 프로이센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중국 화원, 정자, 바로크식 차이나타운이 생겼다. 철학 사조, 풍습, 교육에서 생활에 이르기까지 중국문명은 유럽에 깊은 흔적을 새겼다.

 

과학 문명의 충격

 

역사의 수레바퀴가 급속도로 회전하면서, 평형을 이루던 동·서 문명 간에 대역전이 일어났다. 서방 사람들이 중국문명을 동경하면서 중국산 비단 두루마기를 입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여건이 되면 북미에 이민가려는 것처럼 과거 유럽에서는 오히려 중국 국적을 얻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200년 간 천지가 뒤집힐 만큼 동·서방 사이엔 절대적인 역전이 일어났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태양왕이 보낸 사신이 중국을 여행한 100년 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루이16세가 단두대에 올랐다. 그 전에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디드로 등의 ‘백과전서’ 등이 출판돼 과거 2000여 년과 전혀 다른 유럽의 영혼을 만들었다. 기계, 사회 구조에서 사조에 이르기까지 서방 세계는 연이은 충격을 겪고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미 예전과 전혀 다른 유럽으로 바뀌었다.

 

지구의 다른 한쪽에선 1722년 강희제의 아들 옹정제(雍正帝)가 재위했다. 이후 청나라는 강희제 때처럼 마음을 열고 서방과 문화를 융합할 제왕이 없었다. 재위 첫해 옹정제는 전국적으로 종교 박해를 벌였다. 각국 전도사가 쫓겨나거나 숨었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로써 중국과 서방 사이에는 다리가 끊어졌다. 동시에 옹정제와 그의 아들 건륭은 금서와 사상통제를 하는 ‘문자의 옥(文字獄)’, 외국 문물에 대한 폐쇄정책인 ‘폐관자수(閉關自守)’를 실시, 자신감에 기초한 개방적인 청나라를 점차 폐쇄적이고 나약한 나라로 이끌었다. 그때부터 중국은 세계를 잃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1860년엔 영·프 연합군이 원명원(圓明園)을 점령, 3일간 이곳을 불태웠다. 1900년에는 8국 연합군이 자금성에 쳐들어가 베이징 곳곳을 방화, 약탈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정교한 기계와 영토 확장의 야심이 맞물린 유럽 열강은 ‘낙후한’ 동방과 남반구, 아프리카를 휩쓸었다. 하늘을 공경하고 평화롭던 동방 문명이 파괴되고 ‘과학기술’ 문명이 지구 곳곳에 들어섰다.

 

이후 인류는 과학기술이 가져온 문화가 주재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기계화, 디지털화한 현대문명이 새로운 사유체계를 만들면서 사람은 하늘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위기 앞에서

 

마야예언으로 주목받은 2012년이 지나가고 2013년이 왔다. 쓰나미, 산불, 전염병, 대지진, 금융 쓰나미 등 신세기가 오기 전 인류는 연이은 시련을 겪고 있다. 환경오염과 지구 곳곳에서 발생한 이상 기후 등으로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신(神)과 하늘을 등지면서 인류는 도덕에서 예술에 이르기까지 공허해졌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죽는 일이 마치 태양이 뜨고 지는 듯 보통 일처럼 됐다. 신을 잊은 사회에서 사람은 자신을 현대문명 속에 묻어버려 끝없는 위험으로 떨어뜨린다.

 

모든 것이 가능해진 현대사회의 분위기는 윤리 도덕을 등지고 무질서로 이끌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지구에 갇혀 대량으로 ‘자아’를 추락시키고 있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