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유별’과 ‘남녀평등’의 차이는?…’남존여비’에 관한 오해

ZHOU HUIXIN
2019년 07월 9일 오후 4:12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5

많은 사람이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강한 반감을 느낀다. 그러나 남존여비는 사실 남성은 고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존(尊)’과 ‘비(卑)’는 <역경(易經)>의 음양 평형 개념에서 유래한다. 남존여비의 의미는 ‘남성에게는 남성의 특징이 있고 여성에게는 여성의 특징이 있으니 가정에서 남녀의 역할이 서로 다르게 마련이고, 각자 그 소임에 충실하면 자연히 가세(家勢)가 흥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존여비’의 진짜 의미

‘천존지비(天尊地卑)’란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의미로서 자연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 Pixabay

‘남존여비’의 출전은 <역경>이다. <역경 계사전>에는 ‘하늘은 존(尊)하고 땅은 비(卑)하니 이것으로 하늘과 땅이 정해지고, 낮고 높음이 펼쳐짐으로써 귀하고 천함이 자리 잡는다(天尊地卑,乾坤定矣。卑高以陳,貴賤位矣)… 건(乾)의 도는 남자를 낳고 곤(坤)의 도는 여자를 낳는다(乾道成男,坤道成女)’라는 구절이 있다. 이 중 ‘존(尊)’은 높다는 의미이고 ‘비(卑)’는 낮다는 의미로, 방위를 나타내는 단어다. ‘천존지비’란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의미로, 자연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존(尊)’은 고(高)와 뜻이 통한다. <광야(廣雅)>는 ‘비(卑)’를 ‘비(庳)’와 같다고 설명한다. <광운(廣韻)>에 따르면 ‘비(庳)’는 아래(下)를 의미한다.

<역경>은 우주와 천체의 운행 원리를 묘사한 경전으로서 그 핵심 사상은 음과 양의 평형으로 귀결된다. 평형과 조화 상태에서 벗어난 사물은 결국 모두 정상 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우주 만물은 최종적으로는 조화와 평형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역경>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음과 양이 각자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하늘은 하늘 자리에, 땅은 땅 자리에, 음(陰)은 음의 위치에, 양(陽)은 양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지, 음양, 남녀는 옛 사람들이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사람의 이치도 천지간의 이치를 본받았으니, 남존여비는 곧 ‘천존지비(天尊地卑)’에서 파생된 것이다. ‘남존여비’의 본래 뜻은 ‘남녀는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이는 자명한 구분이자 자연 그대로의 상태다.

‘남존(男尊)’의 의미는 대자연의 특별한 산물인 남성이 ‘도(道)’에 부합하려면 반드시 하늘과 같이 당당하고 공정해야 하며, 자강불식(自強不息‧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쉬지 않는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비(女卑)’의 의미는 대자연의 특별한 산물인 여성이 ‘도’에 부합하려면 반드시 땅처럼 겸손하고 포용해야 하고, ‘후덕재물(厚德載物‧덕을 두텁게 해 만물을 포용한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존여비’는 음과 양이 각자 제자리를 지키는 자연의 조화를 제창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존여비’란 남녀가 평소 생활 및 혼인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남녀가 불평등하다는 함의를 담고 있지 않다. 남성의 품행이 고상하다면 여성도 자연스럽게 그를 존중하고 따를 것이다. 남성은 정직하고 고상하며, 여성은 겸손하고 관용적이면 그 가정은 조화롭지 않을 리 없다. 이러한 가정과 사회라면 여성도 자연히 차별받지 않고 상응하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남녀가 유별하니 각자 소임에 충실하라

그림은 청나라 초병정(焦秉貞)의 <역조현후고사도(歷朝賢后故事圖)>에 나오는 요조숙녀 태사(太姒)의 모습. | 퍼블릭 도메인

맹자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父子有親) 하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君臣有義) 하며,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夫婦有別) 하며,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長幼有序) 하며,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朋友有信) 하나니, 이는 인륜의 대도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오륜(五倫)이다.

남편은 하늘과 같고, 아내는 땅과 같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뜨고 구름이 오가며 비가 내려 땅을 윤택하게 한다. 땅은 산과 강을 품고 만물을 길러 세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번성하게 된다. 남편은 가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아내는 후대를 낳아 기르고 교육한다. 이는 음양의 이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으로, 남녀가 제 특성에 따라 임무를 분담한다. 이렇듯 각자가 소임에 충실하면 가정이 자연히 화목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은 말라붙게 되고 인류의 생활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아내는 기댈 곳을 잃게 되고 가정은 정상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초목이 땅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갓난아이 역시 어미 곁을 벗어날 수 없으니, 그 속의 이치가 참으로 오묘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부부 각자가 서로 다른, 그리고 서로 대체할 수 없는 책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주나라의 세 태비(周朝三太)’, 즉 시조모 태강(太姜), 시모 태임(太任), 며느리 태사(太姒)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의 세 군왕, 즉 태왕(太王), 계력(季歷), 문왕(文王)의 아내였다. 이 세 군왕은 모두 어질고 총명했고, 그 아내들은 모두 성심으로 남편을 공경했다. 세 태비는 천하의 국모로서 나라를 교화하고 군왕을 도와 주나라 800년 태평성세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중국의 빛나는 유교 문화를 낳았다.

<열녀전(列女傳) 모의전(母儀傳) 주실삼모(周室三母)> 편에서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사는 문왕 부인이 된 후 한층 더 현숙해졌다. 시조모 태강과 시어머니 태임의 훌륭한 덕망을 흠모해 그들의 덕행을 이어나갔다. 근면하고 검소한 그녀는 힘써 자녀들을 교육하고 성심성의껏 문왕을 도왔으며, 궁 안의 일들을 조리정연하게 처리했다. 이에 문왕은 아무런 근심 없이 나랏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고, 덕정(德政)을 널리 베푸니 문화가 크게 흥했다. “문왕은 바깥을 다스리고, 문모는 안을 다스렸다(文王治外,而文母治內)”는 말처럼, 태사는 ‘문모(文母)’로 칭송받았다.

인덕(仁德)의 내조자 장손황후

<제감도설(帝鑒圖說)> 속 삽화 <주명신직(主明臣直)>은 예복 차림의 장손황후가 태종이 정직한 신하를 둔 데 대해 축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림은 청나라 초병정(焦秉貞)의 <역조현후고사도(歷朝賢后故事圖)>에 나오는 요조숙녀 태사(太姒)의 모습. | 퍼블릭 도메인

“좋은 아내를 둔 것은 나라에 좋은 재상을 둔 것과 같다.(家之良妻,猶國之良相)” 그 인품을 칭송받는 역사 속 황후들 가운데서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아내 장손황후는 단연코 가장 훌륭한 황후라고 할 수 있다.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장손황후의 오빠다. 그는 이세민과 절친한 사이로, 이세민이 천하를 얻도록  보좌했다. 당 태종이 장손무기에게 재상직을 맡기려 하자 장손황후가 오히려 말렸다. “소첩이 황후 자리에 올라 있으니, 그 존귀함이 이미 지극합니다. 소첩의 형제와 조카들이 조정에 나아가기를 진실로 바라지 않습니다. 한나라 때 여후(吕后)와 곽광(霍光) 가문의 전례가 좋은 교훈이 됩니다. 부탁하옵건대 제 오라버니를 재상으로 삼지 마시옵소서.” 이처럼 장손황후가 재삼 만류함으로써 당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같은 빈 직책만을 하사했다.

장손황후의 친딸 장락공주가 시집갈 당시, 당 태종이 하사한 혼수품이 당 고조의 딸 장공주 때보다 곱절이나 많자 위징(魏徵)은 당 태종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했다. 이를 안 장손황후는 위징을 질책하기는커녕 크게 칭찬했다. 장손황후의 안배하에 장락공주는 지나치지 않은 정도의 혼수를 가지고 출가했다.

장손황후는 평소 언행의 도리와 예법을 성실히 지켰고,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인품이 반듯하고 도리가 있었다. 당 태종은 황후를 무척 신임해서 나라의 큰일과 상벌에 관한 사항을 자주 상의했다. 장손황후가 특수한 신분임에도 나랏일에 간섭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남녀 간에는 구별이 있으며 각자 소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손황후는 조정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이세민에게 종종 유익한 간언을 함으로써 그가 군신 관계를 현명하게 처리하고 정직한 신하를 중용하고 간신을 멀리하도록 도왔다.

재상 위징은 직언과 간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으로, 이세민이 그릇된 일을 할 때마다 즉시 나아가 간언했다. 한번은 당 태종이 교외로 사냥을 나갈 채비를 하던 중 위징과 마주쳤다. 위징은 곧바로 당 태종에게 아뢨다. “지금은 봄이라 만물이 움트고 짐승들이 새끼를 기르는 시기이니 사냥하시기 적절하지 않습니다. 폐하는 궁으로 돌아가시옵소서.” 그래도 당 태종이 사냥하겠다고 고집하자 위징은 길을 막아서서 물러나지 않았다. 부아가 치민 당 태종은 말에서 내려 씩씩대며 궁으로 되돌아갔다.

궁으로 돌아가 장손황후를 만난 당 태종은 “위징 저 늙은이를 죽여야 화가 풀릴 것 같소!” 자초지종을 들은 장손황후는 조용히 예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후 엄숙한 표정으로 당 태종 앞에 나아가 절을 올렸다. “폐하, 감축하옵니다!” 깜짝 놀란 당 태종이 물었다. “왜 이리 엄숙하오? 뭔 일 있소?” 장손황후는 진지한 모습으로 답했다. “소첩이 듣기로는 황상이 영명하면 그 아래 대신들도 충심이 지극해진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현명하시니 위징이 감히 이처럼 직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첩이 황공하게도 황후 자리에 있으면서, 황제께서 영명하시고 신하가 충직한 것을 보고도 어찌 조복(朝服)을 입고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 태종은 깨달은 바가 있었고, 노여움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정관(貞觀) 8년, 장손황후는 피서차 당 태종과 함께 구성궁(九成宫)에서 지내던 중 중병에 걸렸다. 병세가 점차 깊어져 약을 복용해도 차도가 없었다. 이때 곁에서 간호하던 태자 이승건(李承乾)이 모친에게 죄수들을 사면하고 불도를 전파해 하늘의 보살핌을 받자고 청했으나, 황후는 단호히 거절했다. “대사면은 나라의 큰일이고, 불교와 도교에도 각자 계율이 있다. 사사로이 죄수를 사면하거나 포교하게 되면 필시 나라의 정체(政體)에 손상이 가게 된다. 이는 네 부황(父皇)께서 바라는 바도 아니다. 내 어찌 한 부녀자를 위해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태자는 감히 태종에게 주청을 올리지 못했다. 이를 알게 된 태종은 감동한 나머지 목이 메어 흐느꼈다.

장손황후는 향년 36세의 나이로 정관 10년 입정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 태종은 “훌륭한 보좌관을 잃었다”며 무척이나 비통해했다. 당 태종은 재위 기간 중 현명한 치세를 펼쳤으며 경제가 번영했으니, 역사는 이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부른다. 그에게 현명한 내조자가 없었다면, 또는 남녀의 도리를 거스르고 부덕(婦德)을 저버린 아내를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