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은 희망’ 21년 전 중국에서의 역사적 청원을 기억하다

에바 푸
2020년 04월 24일 오후 5:34 업데이트: 2020년 05월 28일 오전 10:02

모든 것이 영원히 달라지는 날이 있다. 1억명에 가까운 중국인들에게는 1999년 4월 25일이 그랬다.

21년 전 그날, 중국 베이징 시청구 국무원의 민원접수창구인 신방국 청사 주변은 서로 초면인 파룬궁 수련생들이 모여들었다.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며칠 전 체포된 다른 수련생의 석방과 안정된 수련환경 보장을 청원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중국의 파룬궁 수련생은 6천만명 이상이었고, 자원해서 하나둘씩 모여든 숫자가 만여 명에 육박했다.

공안은 이들을 인근 푸유제 거리에 한 줄로 세워 국무원의 답변을 기다리도록 했다. 푸유제는 중국 공산당 권력 핵심계층 집단거주지인 중난하이와 가까웠다. 마침 공안이 수련생들을 인도한 곳도 중난하이 건너편 보행로였다.

당시 수련생들은 공안이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지만, 이 일은 훗날 “파룬궁 수련자들이 중난하이를 포위했다”는 가짜뉴스로 만들어져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당했다.

파룬궁 수련생들 사이에서 ‘4·25 청원’으로 불리는 이 일에 동참했던 베이징 은행원 출신 공웨이징(49) 씨는 에포크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마침 날씨가 흐렸다. 아침 7시 국무원 신방국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최악의 사태가 떠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공 씨가 떠올린 최악의 사태는 1989년 6월 톈안먼(天安門·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이다. 4·25 청원은 당시 중국에서는 천안문 시위 이후 첫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

천안문 광장에서 진입한 전차 부대와 군인들이 수많은 비무장 학생과 시민에 총격을 가하고 살해한 기억은 수많은 중국인의 뇌리에 생생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개인적으로 청원(4·25)에 동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파룬따파가 비방을 당할 때, 수련해 이득을 본 사람으로서 나서야 했다.”

파룬따파는 파룬궁의 정식명칭으로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에 따르는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중국의 명상수련법이다. 일반 대중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2년으로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1999년 7월 중공 정권의 탄압을 받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이징 푸유제에 파룬궁 수련자 1만여 명이 모였다. 1999. 4. 25. | Courtesy of Minghui.org

공 씨는 은행원 유니폼을 입고 신분증을 챙겼다고 했다. 10년 전 천안문 광장에 평화롭게 앉았던 학생들에게 ‘폭력행위’라는 혐의가 씌워졌던 게 떠올라서였다.

“사실을 파악하면 당국은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 씨가 언급한 “사실”은 그해 4월 톈진시에서의 사건이다.

1999년 4월 중순, 톈진의 한 잡지에서 파룬궁 비방 기사를 게재했다. 수련생들이 정정 보도를 요청했지만, 공안은 무차별 폭행하고 일부를 잡아 가뒀다. 불법 체포였다.

수련생들이 불법 체포에 항의하자 톈진시 정부는 “공안부가 개입했으므로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베이징으로 향한 수련생들이 만여 명이었던 것이다.

공 씨는 4·25 청원이 “조용하고 차분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푸유제 인도를 따라 걸으며 학생, 교사, 농부, 근로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수백 미터에 걸쳐 늘어선 장면을 봤다고 했다. 한 엄마는 딸을 안고 있었고 아기 유모차를 밀고 온 아빠도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대로변 인도에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현수막을 들거나 포스터를 흔들지도 않았다. 구호도 없었다. 대부분 책을 읽거나 조용히 선 채로 명상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쓰레기를 주으러 다녔다. 사람들은 자전거가 다닐 수 있도록 공간을 남겨뒀다.

공 씨에 따르면, 중난하이의 업무시간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뒤 주룽지 당시 중국 총리가 수행원이 없이 혼자 나와서 둘러보더니, 의견을 듣겠다며 대표 3명을 선정해 들여보내라고 했다.

공 씨는 3인의 대표 중 한 명이었다. 중난하이 내부로 들어간 대표들은 주룽지 총리의 도움으로 국무원 신방국과 중앙판공처 당국자들을 만나 수련생 석방, 수련환경 보장, 수련 서적 출판 허용 등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수련지침서 ‘전법륜’을 건네주고 나왔다.

몇 시간 뒤 톈진 수련자들이 풀려났고, 이 소식은 그날 오후 9시 현장에 있던 모든 수련생에게 전달됐다. 수련생들은 바로 해산했다. 갈등은 그렇게 완전히 해소된 듯 보였다.

그러나 석 달 뒤인 1999년 7월 20일, 중공 정권은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관영 CCTV는 수억 명의 시청자들에게 수개월에 걸쳐 파룬궁을 비방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세뇌 수준이었다.

공 씨는 곧 직장으로부터 퇴직연금이 동결되고 사상교육에 참여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고 이를 피해 집을 떠났다가 거의 10년 가까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했다.

한번은 천안문 광장에서 파룬궁을 위해 진실을 알리려다 공안에 붙잡혀 가혹행위를 당했다. 공안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부당한 체포에 단식하는 공 씨에게 고무 튜브를 목으로 넣어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하는 고문을 가하고 “코에 종이를 대고 물을 부어 질식사시킬 수도 있다”며 위협했다.

풀려난 후에도 공안의 추적은 계속됐고 공 씨는 가족의 피해를 우려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2015년에야 아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녀는 “그제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게 됐다”는 소감을 밝혔다.

공 씨는 “남편은 아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내게 이혼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탄압이 끝나고 다시 결혼할 생각이었다고 했다”며 “안락한 가정을 나 때문에 잃은 것 같아 남편에게 사과하자 남편은 ‘걱정 말고 계속 수련하라’고 지지해줬다”고 했다.

미국에 서버를 둔 파룬궁 정보 사이트 밍후이왕(Minghui.org)에 따르면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 중 신원이 확인된 경우만 4천406명으로, 중국의 정보검열과 증거인멸을 고려하면 실제 사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공 씨는 최근 발생한 중공 바이러스(우한폐렴) 사태에 대해서도 논평했다. 그녀는 “중공의 정보은폐를 볼 때 사람을 기만하는 습성은 여전한 것 같다”며 “내 대학 동창은 (중공이) 뭔가 나쁘게 말하면 그건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