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韓人음악가 정율성⑤] 내년 영화·드라마로 ‘한중 가교’ 띄우기 예고

최창근
2021년 11월 15일 오후 8:18 업데이트: 2024년 01월 20일 오후 10:49

다수 한국인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 정율성. 그는 일제 강점기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 땅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해방 후 잠시 ‘북한인’이 됐다, ‘중국인’으로서 삶을 마감한 ‘한인(韓人)’ 음악가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제2 국가(國歌) 격인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여 녜얼(聶耳)·센싱하이(冼星海)와 더불어 중국 현대 음악계 3대 악성(樂聖), 중국 군가의 아버지로도 꼽힌다. 생애 동안 360여 곡을 남긴 그의 노래를 14억 중국인 중 10억 이상이 알고 있다.

정율성의 삶을 두고서는 항일(抗日) 독립운동가라는 평가와 북한·중국을 위해 헌신한 공산주의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에포크타임스’는 5회에 걸쳐 정율성의 행적과 논란을 다룬다.

정율성 관련 영화·방송프로그램을 둘러싼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2011년 공영방송 한국방송공사(KBS)는 ‘KBS 스페셜’ 광복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을 편성했다. 방송 전인 8월 10일, KBS 이사회는 “한국전쟁에 북한군으로 참전했고 중국에서 혁명가로 추앙받는 인물을 공영방송 KBS에서 조명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부장급 이상 간부사원으로 구성된 ‘KBS 공영노조’도 “정율성이 만든 노래는 한결같이 공산혁명을 부추기며 민족 간 갈등을 선동하며,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진동하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동아시아의 평화를 노래한 사람’으로 미화할 수 있나” “중국 공산당에 매료돼 자신의 모국도 아닌 이국에서 그야말로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로 부역했으며, 나아가 민족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과거를 묻어둔 채 겨우 한 두 편의 (그것도 실체가 없는) 시가와 일천한 ‘항일 행적’을 토대로 개인을 우상화하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라고 주장하며 방영을 반대했다.

논란 끝에 프로그램은 해를 넘겨 2012년 1월 방영됐다. 방송 후 제작 담당자 박건 KBS PD는 ‘미디어오늘’에 게재한 ‘항일운동가 정율성을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글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친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세상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험난한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선 인물에게 이념 공세를 앵무새처럼 떠벌리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의 앵무새를 떠올리곤 한다. 묘하게 이들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별 어려움 없이 오버랩된다. 어떻게든 체제 수호란 명분으로 떠들어 대며,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고,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목 내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KBS가 2012년 제작한 정율성 다큐멘터리 | 화면 캡처

방송을 두고 KBS 공영노조는 ‘추악한 프로그램 정율성, 더 추악한 제작자와 간부들’ 성명에서 “(다큐가) ‘조선인민군가’ 등을 지은 공산군가 전문 작곡자로서의 핵심을 철저히 숨기고 실체가 불분명한 항일 행적과 인간적인 면만을 장황하게 나열하며 미화하기에 급급했다”고 비판했다.

공영방송 KBS의 정율성 다큐멘터리 논란
북한·중국에서는 전기 영화 제작 줄이어

중국·북한에서도 정율성 영화·프로그램 제작이 이어지고 있다. 1992년 북한에서는 대형 시대 영화 ‘음악가 정률성(상·하)’을 제작했다.

중국에서는 2002년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개봉했다. 영화는 2004년에는 광주국제영화제에서도 특별 상영됐다.

이어 2022년 한중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정율성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돌입했다.

중국이 정율성 재조명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율성이 조선 출생 중국 국적 인물, 즉 ‘조선족’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당국의 ‘정율성 껴안기’와 관련해서 한 베이징 소식통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정율성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다. 소수민족인 조선족을 아우르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 온라인판(신화망) 한국어판에서는 정률성을 항일투사로 전하고 있다.  | 화면 캡처

쑨자정(孫家正) 전 중국 국무원 문화부장은 “정율성은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는 한중 양국 인민을 긴밀히 연결시켜 공동으로 양국의 평화 사업을 위해 노력하게 해 줄 것이다. 정율성은 영원할 것이다. 그는 중국 인민의 영광이며 또한 한국 인민의 영광이다”고 상찬한 적도 있다. 역시 중국인임을 강조한다.

2022년 상영 예정인 정율성 영화 제작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공산당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한국 측 제작사인 미래숲미디어문화주식회사(대표 권병현)는 사단법인 미래숲이 2021년 6월, 자본금 1억 원 규모로 설립한 회사다.

권병현 대표는 1998~2000년 제4대 주중한국대사를 역임했다. 권병현 전 대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친중파 인사이다. 2001년 ‘사단법인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현 미래숲)’ 설립 후 한중 청소년 교류, 사막화 방지를 위한 중국 내 조림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권 전 대사는 2013년 인민망 인터뷰에서 “외교관 지망생 시절부터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당시에는 중국이 멀기만 한 나라였지만, 언젠가는 관계를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미래숲미디어문화와 인물 전기 영화 ‘정율성’ 30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열혈군가’와 중국 배경 항공 우주 드라마 ‘우주인(Astronaut)’ 등을 제작할 중국 측 파트너사는 이광국제경제문화집단유한공사(怡光國際經濟文化集團有限公司)이다. 1995년 설립된 중국국제문화예술센터(中國國際文化藝術中心·CICAC)의 자회사이다.

내년 제작될 30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열혈군가’ 포스터 이미지. 아직 내용은 공개된 바 없지만 항일 투쟁이 주요 내용으로 그려질 전망이다. | 인민망

국내 친중단체와 중국 거대문화기업의 합작

1992년 설립된 중국국제문화예술센터는 문화·예술 공연 전문 법인이다. 설립자 왕광잉(王光英·2018년 사망)은 이른바 ‘홍색(紅色) 자본가’의 대표 격이다.

왕광잉은 1919년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문화대혁명 중 실각하여 수감됐다 옥사(獄死)한 전 중국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는 친남매간이다. 베이징 푸런대학(輔仁大學) 졸업 후 실업에 투신하여 은행·보험·금융투자·증권 자회사로 구성된 금융기업 중국광다그룹(中國光大集團·China Everbright Group)을 창립했다.

정계에서는 제8·9회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제6·7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중국 공산당 해외 통일 전선 분야에서는 중국평화통일촉진회 회장, 중화해외연의회 명예회장, 중국국제과학화평촉진회 회장, 중국 홍십자(적십자)회 명예 부회장 등을 맡아 활동했다.

2018년 사망 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열사공묘에 안장됐다. 영결식에는 시진핑 국가 주석, 리커창 국무원 총리 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대거 참석했다. 관영 통신 신화사는 왕광잉을 두고 ‘중국 현대 민족 사업가의 우수 대표’ ‘중국민주건국회와 전국공상연의 걸출한 지도자’ ‘중국 공산당의 친밀한 벗’ ‘저명 사회활동가’라 평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중국국제문화예술센터와 자회사 이광국제경제문화집단이 중국 문화·예술계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중국 공산당의 입김도 짙다. 결과적으로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의 한국과 자국 내 조선족 끌어안기 주요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중국 공산당이 정율성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의도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