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조총련, 北 기획한 북송사업 실행…北 공작기관 역할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실체 ③

이윤정
2022년 11월 11일 오후 1:48 업데이트: 2024년 03월 9일 오전 9:41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후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 9만3340명 중 재일 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고,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2022년 발간한 ‘지상낙원으로 간 그들은 어디에? : 기만적 북송사업과 강제실종’은 그 실체를 규명한 보고서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을 얻어 보고서를 바탕으로 재일교포 북송사업 실체를 분석한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북송사업은 북한 정보기관에 의해 기획 및 진행됐으며, 일본에서 북송사업 실행은 조총련을 통해 이뤄졌다.

김일성이 국가정보기관에 무슨 명령을 어떻게 내렸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다. 공작 활동의 특성상 비공식적으로 일을 수행하며, 이와 더불어 본인의 업무 관련 이외의 정보는 철저히 차단된 북한 체제의 특수성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공개된 외교문서, 북한에서 조총련을 담당한 공작기관에서 근무했던 인물 및 관계자의 증언 등을 통해 북한의 국가정보기관이 북송사업에 관여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북한 공작기관

북송사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증거가 있는 북한의 정보기관은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연락부와 문화부, 통일전선부다.

연락부는 1947년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부 내에 창설된 대남공작부서로, 잦은 개편과 명칭 변경을 거쳐 지금은 내각 소속이 된 ‘225국’의 전신이다. 연락부는 북송사업 초기부터 깊이 관여했다. 1958년에 이미 북한의 공작기관인 연락부가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 재일교포를 동원하며 북송사업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연락부는 거물급 자본가들을 회유해 자금을 확보하는 데에도 중점적으로 활동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본가 자녀들을 북송시키기도 했다.

문화부 역시 북송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여러 정황이 포착됐다. 1956년 대남 선전·선동 업무를 전담하는 조직으로 창설된 문화부는 1955년 5월 발족한 조총련에 대한 지도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74년 5월, 문화부와 연락부가 통합돼 문화연락부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그동안 문화부에서 관장하던 조총련 및 해외동포들과의 사업을 국제부로 이관하기 전까지 조총련에 대한 북한의 지도는 문화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초대 문화부장에는 국제부 부부장 출신의 김중린이 임명됐다. 김일성은 “김중린이 항상 당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며 중앙당 간부들에게 “김중린의 학습 방법을 따라 배우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지시를 내린 바 있다. 1959년 2월 북한 내각이 북송사업을 최종 결정한 후 바로 김중린을 북일 적십자회담 대표로 임명한 것으로 미뤄 보아 문화부가 북송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김중린은 조총련 관계자들을 공작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가 공작원으로 교육한 조총련 시즈오카현본부 부위원장인 이성우는 한국에서 간첩 혐의로 검거됐다. 이성우는 1961년 6월과 1971년 6월 두 차례 입북해 간첩 교육을 받았으며, 김중린으로부터 북한국가훈장을 받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1962~1967년까지 230명의 재일교포를 북송시켰다. 또한 재일교포에게 공작금을 전달해 한국으로 잠입시켜 정보수집 활동을 시켰다. 문화부장인 김중린이 이러한 활동을 단독으로 결정하고 실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총련에서 17년 동안 근무한 증언자에 의하면, 최종 결정권은 김일성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통일전선부의 비교적 최근 활동에 대해 분석하면, 북한 공작기관이 북송사업 이후에도 북송 재일교포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일전선부는 문화부와 연락부가 역사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 만들어진 조직이다. 북한은 1974년 5월 문화부와 연락부를 문화연락부로 통폐합했다가 그해 10월 다시 분리했다. 1977년 10월에는 해체됐던 문화부가 통일전선사업부라는 명칭으로 부활하고, 1978년 1월에는 문화부 부장이었던 김중린이 통일전선부 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통일전선사업부는 1987년 연락부 전체를 흡수하며 대외연락부로 변경됐다. 그러나 통폐합 2년 만에 기존의 연락부 업무가 분리되며 사회문화부로 독립했고, 나머지 부서는 통일전선부로 환원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통일전선부 소속 6과는 적어도 2001년까지 북한에 거주하는 특수 북송 재일교포를 관리했다.

조총련의 북한 공작기관화

북송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1958년경 오무라 수용소의 수용자를 포함하더라도, 북한으로의 자발적인 북송을 원했던 재일교포는 아무리 많아도 1500명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송이 재일교포 사회의 가장 큰 열망이 되어 북송사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실제로 북송자가 단기간에 약 10만 명 규모로 확대된 현상을 재일교포들의 자발적인 선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북한의 지시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북한의 전위대 역할을 한 조총련이 있기에 가능했다. 조총련은 북송사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계획적·체계적으로 일을 진행했으며, 이는 조총련이 북한의 공작 기관으로 기능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총련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로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재일교포 단체다. 표면적으로는 재일교포의 이익을 표방하는 자치단체이지만, 사실 친북적 성향의 사회단체, 더 나아가서는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전위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북한은 조총련의 결성과 그 이후 활동까지도 관여하며 철저하게 조총련을 종속기관으로 만들었다.

조총련의 전신은 1945년 해방과 함께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이하 조련)이다. 조련은 공산주의 사상의 과격 반일 사상단체로 지적받아 연합국최고사령부(SCAP)에 의해 해산됐다. 이후 조국 방위대 및 민전을 거쳐 북한계 사회주의 단체로서의 조직성을 명확히 한 조총련이 결성됐다. 이러한 조총련의 출범 과정은 범민족 단체로부터 사회주의 지향 단체로, 그리고 사회주의 지향 단체에서 일본공산당의 영향을 탈피해 친(親)북한계 민족단체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친북한계 민족단체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북한은 적극적으로 조총련 결성에 개입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한덕수라는 인물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덕수는 친북한파 인물로 조총련 출범 연도인 1955년부터 94세로 사망하는 2001년까지 46년간 조총련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한덕수는 재일교포는 일본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 되며, 북한에 충성을 맹세하는 공민으로서 행동하고 위대한 김일성 수령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조련 해산 이후 민전이 구성되는 시기에 한덕수는 일본 공산당의 지도에 반발하고 있던 주요 핵심 인물이었다. 북한은 한덕수를 통해 사상·자금을 주입해 일본에 북한 중심의 단체를 조직하고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결국 1955년 5월 25일 창립대회에서 친북적 내용의 강령을 공식 표명하며 북한 노동당의 강력한 지도를 받는 한덕수 중심의 조총련이 결성됐다.

이 강령의 제1조에는 “우리는 재일 전체 조선 동포들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주위에 총집결시키며”라고 언급하고 있다. 규약 제1장 7조에서는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맹한다”라고 공식 표명했는데 이는 조총련이 북한의 통일방식을 지지하며, 조선노동당의 영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총련은 모든 사업 지침의 근거로 김일성의 담화, 또는 최고인민회의의 결정 등을 사용하며, 북한의 지도와 방침이 조총련 활동의 근간이 됐다. 이는 북한이 조총련을 자신들의 방침에 맞게 조종할 수 있음을 뜻한다. 조총련 결성 직후인 1955년 8월 28일, 조총련방문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조선인 운동에 대해 “재일 우리 동포는 먼저 자기 조국의 통일 독립을 위해 미제와 이승만에 반대하는 것”이며 “일본인의 혁명은 일본 국민의 신념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 “조총련의 새로운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등 조총련이 북한의 통일노선을 따르며, 일본 공산당과 함께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김일성의 교시는 조총련의 해방신문에 전문이 소개됐고, 조총련은 이에 대한 맹세 결의의 총궐기대회를 전국 산하에 지시해 김일성의 교시가 조총련의 정책과 활동의 기조가 됐다. 북한의 정치 사전에도 조총련을 ‘주체사상의 지도 이념을 실천하고 수령의 영도를 받는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조총련은 재일교포의 권리 신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출범한 단체라기보다는 북한의 정부 기관으로 행동했다. 북한이 조총련을 장악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인(남한)과 일본인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재일교포를 대남·대일 공작 활동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즉, 조총련을 북한의 공작기지로 삼은 것이다.

북한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재일교포에게 물질적 지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러한 지원은 조총련을 통해 이뤄졌다. ‘공작 활동’과 ‘물질적 지원’의 교환이 이뤄진 것이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북한의 조선학교 지원이다. 북한의 조선학교 지원은 조총련과 연계돼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실제로 북한은 조총련을 통해 1957년 처음으로 두 차례에 걸쳐 2억 2200만 엔의 교육원조금을 보냈으며, 북송사업이 시작된 1959년 12월까지 모두 7억 엔을 전달했다. 당시 상당한 금액이었던 7억 엔을 기반으로 조총련은 조선학교를 건립·운영하고 학생들에게 막대한 장학금을 제공하면서 많은 재일교포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됐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조선 공민들이 다니는 거의 모든 학교 교육체계가 조총련 단체들의 영향력하에 있다”고 자부했다.

조총련, 조직적·체계적으로 북송사업 수행

조총련은 북송사업의 완수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활동을 일사불란하고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는 철저하게 공작기관화된 조총련의 성격과 더불어 조총련의 방대하고 체계적인 조직구조 때문에 가능했다. 북한과 동일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는 조총련은 행정조직과 정치조직으로 분리돼 있으며, 철저하게 중앙집권체제다. 조총련은 도쿄의 조총련중앙을 중심으로 일본의 각 도도부현(都道府縣)에 지방본부와 지부, 분회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상명하달식 지휘체계를 통해 북한의 지시사항이 조총련의 말단 조직까지 성공적으로 전달 및 수행됐고, 북한은 일반 재일교포에게까지 조직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59년 8월 20~21일에 개최된 제19차 중앙위원회에서 한덕수 의장이 연설하면서부터 조총련이 직접적으로 북송자 모집에 돌입했다. 이 연설에서 한덕수 의장은 “(조총련의) 모든 사업은 귀국사업의 성과를 내는 목적에 두어야 한다”면서 북송자 확보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강조했다.

장명수 씨 역시 “이때 한덕수 의장이 ‘승리의 신심을 굳혀 귀국 희망자의 대열을 확대하고 귀국 준비에 나서자. 우리는 당장 모든 귀국사업의 성과적 추진을 위해 귀국자의 대열을 강화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연설했다”고 적었다.

다수의 증언자가 조총련중앙의 정치국·조직부 등 여러 부서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북송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사실에 대해 증언했다.

▲증언자 A의 외삼촌은 오카야마와 후쿠오카에서 20~30년 동안 현 본부 정치부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까지 조총련중앙 정치국장을 맡았다. 그는 외삼촌의 이야기를 근거로 정치국이 북송자 모집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각 현 본부와 지부, 분회의 정치부에서 직접적인 활동을 하도록 지시를 하달했다고 증언했다. 각 현 단위 본부에도 정치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정치부가 있었으며, 마을 단위인 각 분회에는 말단책인 선전원이 있어 이들이 실질적으로 재일조선인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증언자 B는 조총련중앙의 조직부장이었던 그의 시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근거로 조총련 중앙의 조직부가 북송사업에 관여한 사실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조총련의 조직부가 북한의 공작기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조총련의 고위 간부들은 평양 방문 시 사격 훈련, 암호화 훈련 등 공작 활동에 필요한 교육도 받았다고 한다.

▲장명수 씨는 그의 저서에서 조총련중앙의 사회부도 북송사업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총련중앙의 사회국 지도원으로 근무할 당시 사회국은 북송사업이나 ‘조국 방문’ 등을 맡았다고 증언했다. 이때 조총련 중앙의 간부들이 재일교포의 권리를 옹호하기보다는 대남공작 활동과 북한 정치학습 우선을 일관되게 지시했다고 한다.

▲조총련에서 27년간 근무한 증언자 C는 “조총련에서는 조직국이 가장 중심이 되는 부서이며 권한이 막강하다”고 증언했다. 이런 조직국까지 북송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북송사업이 조총련 활동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