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북송사업은 재일교포 노예화를 위한 대규모 강제 이주였다”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실체 ⑩

이윤정
2022년 12월 31일 오후 4:38 업데이트: 2024년 03월 9일 오전 9:41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후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 9만3340명 중 재일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고,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북송사업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일본에 남아있던 재일교포의 자발적 귀국을 지원하는 ‘인도적 귀국사업’으로 포장돼 왔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사장 김석우·이하 시민연합)은 지난 2월,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실체를 밝힌 ’지상낙원으로 간 그들은 어디에-기만적 북송사업과 강제실종(저자 이지윤・김소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해당 보고서를 바탕으로 총 9회에 걸쳐 연재한 특집기획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보고서 공저자인 이지윤 국제협력캠페인팀 팀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12월 19일,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이 팀장은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두고 “재일 교포의 노예화를 위해 북한 정부가 기획하고 조총련이 실시한 대규모 강제 이주였다”고 말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지윤 국제협력캠페인팀 팀장이 에포크타임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석사 과정으로 국제학을 공부했어요. 평소 ‘단계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졸업할 때쯤 개인 차원에서는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단계적·평화적 통일을 이루려면 북한의 인권 문제가 먼저 개선돼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를 위해 활동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일하게 됐다는 이 팀장은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창립한 윤현 이사장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알게 된 윤현 이사장이 북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연합을 창립했던 그 정신에 감동하고 공감했다는 것.

2019년 작고한 윤현 전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은 1960~1970년대 한국에서 국제인권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1972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를 설립해 당시 억울하게 구속된 시국사범들과 양심수 구명에 힘썼다.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인권이 개선됨에 따라 1996년 5월, 인권운동가·지식인·탈북자 등과 함께 ‘북한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시민연합(현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창립해 국제적 공론화 활동에 주력해왔다.

이 팀장은 “책으로 배웠던 북한의 체제와 인권 상황에 대해 현실적·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됐다”며 “목표가 분명하고 일의 성과도 보여서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에 비치된 북송 관련 자료들. 재일교포가 기증했거나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수집·구매한 북송 관련 잡지들과 일본적십자사에서 복사해 온 자료들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보고서를 만들게 된 동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보고서를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일본에 거주하는 분이 ‘강제실종 피해자’라며 북송사건 관련해 유엔 강제실종 실무그룹(UN Working Group on Enforced or Involuntary Disappearances·WGEID)에 진정서를 내고 싶다고 해서 인터뷰와 사례 수집을 위해 2018, 2019년 두 차례 일본에 갔었어요. 그런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북송사건이 단순한 귀국이 아니라 거대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강제실종이란 국가기관이나 국가 역할을 자임하는 조직 등이 피해자를 체포·구금·납치해 실종시킨 뒤 이를 인정하지 않아 피해자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만드는 범죄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던 중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납북자 문제, 강제실종, 북송사건 등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가 있어서 10페이지 분량의 간단한 소개서를 만들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행사가 취소됐어요.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조사해보자고 마음먹은 게 100페이지 넘는 보고서가 나오게 된 거죠. 2년이 걸렸습니다.”

-취재와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정보 수집이 가장 어려웠죠. 강제실종 피해자나 그 가족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북송 후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면 종신형을 살기 때문에 피해 사실 자체가 묻히는 수가 많고, 강제실종 당하는 경우도 많아서 가족분들도 두려움 때문에 얘기를 잘 못 합니다. 특히 연좌제로 끌려간 경우에는 풀려난 뒤 탈북해서 저희를 만나 증언을 해 주셔야 해서 이야기 수집 자체가 어려웠어요.”

“일본에 계시는 분들도 조총련 때문에 조심하는 측면이 있어요.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북송사업 피해자 증언을 하려고 하면 조총련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분을 만나셨나요?

“실종된 북송자 가족 6명, 북송자 출신으로서 탈북한 7명, 관련 목격자 6명을 인터뷰했어요. 이분들이 자기 가족 17명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어요.”

보고서에는 총 19명의 증언자가 등장한다. 이들과 인터뷰해 수집한 강제실종 사례는 피해자 가족 증언 17건을 포함해 총 102건에 달한다.

2019년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 적십자사를 방문한 이지윤 팀장(왼쪽에서 두번째) | 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북송 재일교포 10만 명 중에 탈북자는 얼마나 되나요?

“정부 차원의 정보 수집이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집계는 안 되고 있어요. 저희가 이야기 듣기로는 일본과 한국에 각각 200~300명 정도 계신다고 알고 있지만 제 생각엔 그보다 훨씬 많을 거로 생각합니다.”

-피해자 증언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이 질문에 “1963년 당시 한 10대 소년이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도착한 뒤, 하선을 거부하며 일본으로 귀국을 요청하다가 강제실종된 사례가 있었다”며 이 팀장이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북송선 총책임자였던 중앙당 조직비서 겸 정치부장은 이 소년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며 군인에게 지시를 내려 부모로부터 분리해 끌고 갔다. 이후 그 소년은 49호 병원이라 불리는 정신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뒤 생사를 알 수 없다.

당시 마지막 목격자였던 여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대외적으로는 병원시설로 알려진 49호의 실상은 지붕조차 없는 야외 철장으로 된 수감시설이었다. 실종된 오빠를 면회하기 위해 1968년 부모님과 49호 병원을 방문한 여동생은 도착 후 간수들의 안내를 받아 오빠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오빠는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동물 우리같이 생긴 야외 철장에 갇혀 있었는데, 수감자들은 배변과 오물을 뒤집어쓴 상태로 한데 엉켜있어 매우 더러웠고 영양상태가 나빠 보였다. 간수들이 장화를 신고 철장으로 들어가 의식이 없는 듯한 오빠의 양팔을 끌고 나와 보여주는 것으로 면회는 종료됐고,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북송사업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 적십자사를 방문한 이지윤 팀장 | 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북한이 약 10만 명의 재일교포를 송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치적·외교적·경제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 대규모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귀국한 것은 북한이 남한보다 우월한 체제라는 점을 과시할 수 있고 국제사회에는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부각할 수 있는 방안이었습니다.”

“경제적 동기가 제일 컸다고 봅니다. 재일교포를 통해 전후(戰後) 국가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력, 노동력이 필요했던 거죠. 이 때문에 북한은 조총련을 앞세워 전문 기술자, 지식인, 자본가, 기업가 등 엘리트 집단을 선발하기도 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모집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데 대규모로 모집한 인력은 힘든 노동이 필요한 광산, 농업 쪽으로 보내고, 엘리트 집단은 일부 평양으로 보내기도 했어요. 이는 북한이 북송자에 대해 차별하지 않는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재일교포들은 북송을 희망했을까요?

“첫 북송선이 출항하기 1년 전인 1958년만 해도 북송 희망자는 많지 않았고 재일교포 대다수는 남한 출신이었기에 북한에는 연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총련은 북송 사업 자체가 자발적 귀국 운동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활동들을 굉장히 많이 했고 대표적인 게 잘 알려진 나카도메 결의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총련도 1958년 이전에는 일본 내 재일교포 생활 안정에 주력했다. 하지만 1958년 8월 11일, 재일교포들이 북송을 희망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최초 집회로 알려진 이른바 ‘나카도메 결의’가 일어났다.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나카도메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이 집회를 열어 북한으로 갈 것을 결의하고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보고서는 “나카도메 결의는 사실 북한의 철저한 기획하에 진행된 각본 있는 드라마”라고 했다.

-일본 정부가 이를 방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북송 사업을 제안한 건 일본입니다. 1959년 일본에서 북송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국제적십자사에 연락해서 재일교포의 송환을 계속 요청했던 정황 자료들이 있어요. 재일교포는 1952년 재일조선인 시민권을 박탈당해 굉장히 불안정한 지위에 놓였고 직업 제한도 많았습니다. 일본 정부는 재일교포의 생활보조비 지급 등으로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는 걸 부담스러워했고 이들의 범죄율이 높다고 인식한 일본 정부는 재일교포를 골칫거리로 인식한 것이죠.”

북송자가 일본의 가족에게 생활용품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 | 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소련도 지원한 것으로 나오던데요.

“북송선을 호위하기 위해 해군을 지원하기도 했고, 북한-일본 간 외교라인이 없는 상황에서 정보 수집 등을 위한 외교 지원도 했습니다. 최근 이런 자료가 많이 공개됐어요.”

“한 예로, 최초 북송선이 출항하기 하루 전인 1959년 12월 13일, 한국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한국 해군에 경계 태세를 내리자 소련은 ‘만약 북송선을 공격한다면 소련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죠.”

-국제적십자사는 ‘중립적·독립적 인도주의 기구’를 표방하며 활동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는데 북송사업에 관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데요.

“사실 북송사업이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었던 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영향이 컸어요. ICRC가 개입하면서 북송 사업에 대한 평화로운 이미지를 선전할 수 있었고, 재일교포들도 북송을 진짜 귀국 운동으로 판단했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ICRC도 북송사업이 정치적 이슈라는 건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어떤 조치도 없이 묵인했던 것이죠.”

“당시 ICRC는 북송사업에 관여하는 조건으로 일본 당국에 조건을 걸어 재일교포들에게 북송에 대한 진정한 선택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일본에서의 거주권과 복지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ICRC는 북송 신청 절차, 귀환안내서 작성 및 배포 등을 일본 정부와 일본 적십자사에 일임하고 북송 사업 절차를 관리·감독·확인해야 하는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어요.”

북송 사업 관련 내용이 실린 잡지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북한을 ‘지상 낙원’과 같은 희망의 땅으로 보이게 하는 선전 사진 등을 게재한 천리마 잡지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그럼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북송사업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관련된 책임기관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가해자라고도 볼 수 있는 주체들이 북송사업을 방조하거나 묵인해놓고는 북송은 귀국 사업이고 북송자들의 자발적 선택이라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겨 왔던 거죠. 책임 규명을 위해선 북송사업 책임 주체인 북한·조총련·일본·소련·국제적십자사가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한국 정부는 왜 북송사업에 반대하면서도 재일교포를 수용하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재일교포를 수용할 경제적 여건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부는 북송사업을 강력히 반대했고,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비공개로 일본에 공작원을 파견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앞으로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이번에 진실규명위원회에 북송사업 피해자 32명을 대리해서 진실 규명을 해달라고 신청서를 접수했어요. 북송사업 시행 당시와 이후 대한민국 외교부, 정보기관 등 정부 측에서 파악하고 있던 상황과 관련 기록을 수집하고 공개해 달라고 했고, 북송사업의 주요 책임 가해자를 밝히고, 북송 재일교포들에 대한 인권유린의 실체를 규명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재일교포 북송사업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지난 12월 9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방문해 해당 사안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신청서를 제출하고 공식 조사를 요청한 바 있다.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진상 규명을 위해 이달 한·일 NGO 연대 형식으로 조직된 위원회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을 비롯해 ‘모두 모이자(대표 가와사키 에이코)’ 전환기정의워킹그룹(대표 이영환), (사)북한인권(이사장 김태훈),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한변) 등이 참여했다.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이지윤 팀장은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재일 교포의 노예화를 위해 북한 정부가 기획하고 조총련이 실시한 대규모 강제 이주였다”고 정의내렸다. | 이유정/에포크타임스

“이 보고서를 통해 더 많은 분이 북송사업의 책임은 이를 기획하고 실행한 북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북한에 가기 전에 자기 출신 배경 때문에 차별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북송선에 탔겠느냐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하는 건 그분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부분 남한 출신이었고, 북송 후 처하게 될 상황에 대해 진정한 의미의 동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착취에 시달릴 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인권 불모지로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