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④ 대만 핵 무기 개발 책임자의 망명, 강제 비핵화

[기획연재] 대만의 핵 무장은 가능할까? 좌절된 대만의 핵 개발 진상 ④

최창근
2022년 08월 14일 오후 3:41 업데이트: 2022년 08월 14일 오후 3:42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 간 긴장이 고조됐다. 핵무기 보유국이자 미국에 대적할 만큼 국방력을 증대해 오고 있는 중국에 비하여 대만의 국방력은 절대 열세이다. 이 속에서 대만 방위를 위해서는 핵 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대만 정부는 국제규범에 따라 핵무기 관련 생산·개발·획득을 하지 않는다는 ‘3불 정책’을 확인하고 있지만 ‘핵무기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던지고 있다. 실제 대만은 독자 핵 개발을 시도했었고 성공을 눈앞에 두었으나 내부 ‘간첩’으로 인하여 좌절된 역사가 있다. 비밀리에 추진됐던 대만 핵 개발 역사는 어떠했을까. ‘에포크타임스’는 관련자 증언,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추적했다.

관련기사
① 대만이 핵 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이유는?
② 1970년대 핵 개발을 둘러싼 대만과 미국의 갈등
③ 대만 핵 무기 개발 카운트 다운, CIA, 그리고 스파이

핵무기 제조 능력은 가지되 제조하지는 않는다

장징궈(蔣經國) 총통은 핵 개발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었지만 공식적으로 NCND(Neither Confirm Nor Deny·시인도 부인도 안 함)를 유지했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했다. 핵무기 제조 능력은 가지되, 제조하지는 않는다(有能力製造但不製造)는 것이었다. 이는 타오위안계획의 대원칙이기도 했다.

1971년 행정원 국방부장 시절 미국을 방문하여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좌)와 회견하는 장징궈(우).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레이건은 대만의 비밀 핵 개발 문제로 장징궈와 갈등을 벌인다.

1987년 대만의 핵 무기와 운반 수단 개발이 가시화됐고 미국 정부의 우려도 증대됐다. 통치자 장징궈 총통의 건강 문제였다. 1978년 총통 취임 이후 그의 지병인 당뇨병과 합병증은 악화일로였다. 장징궈가 지명한 공식 후계자는 리덩후이 부총통었지만 실질 권력은 위궈화(俞國華) 행정원장 , 니원야(倪文亞) 입법원장, 린양강(林洋港) 사법원장, 리환(李煥) 국민당 비서장, 하오보춘 참모총장 등 중국 본토 출신 원로 수중에 있었다.

미국 정부는 장징궈 사후 리덩후이가 정권을 장악한다면 나쁘지 않다 판단했다. 리덩후이는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학자 출신 테크노크라트였다. 온건 성향이었고 정치적 야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문제는 국민당 보수파 원로, 그중에서도 하오보춘이었다.

‘반공대륙(反攻大陸)’을 신봉하던 하오보춘은 군부 강경파의 대표주자였다. 장징궈의 절대 신임하에 1981년 참모총장이 돼 군령권을 장악했다. 규정상 참모총장 임기는 2년이었지만 연임을 계속하며 1987년까지 자리를 지키며 ‘영원한 참모총장’으로 불렸다. 하오보춘은 국가중산과학연구원 원장도 겸하며 핵 무기 개발 계획도 관장했다. CIA는 하오보춘이 실권을 장악하면 대만 비핵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대만 군부 강경파와 핵 무기

육군 총사령 시절 하오보춘(우)이 대만 총통이 되는 마잉주(좌 첫번째)와 악수 하고 있다. 훗날 하오보춘의 장남 하오룽빈은 마잉주의 뒤를 이어 민선 타이베이 시장이 된다.

이 속에서 CIA는 대만 비핵화를 위해서 ‘비상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핵 무기 개발 책임자를 망명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포섭한 스파이 장셴이(張憲義) 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을 통해 대만의 비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지속 확인했다. 비밀 핵 연료 재처리 시설 정보를 입수했지만, 사찰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장셴이의 신변 안전 보장을 위한 조치였다.

1987년 여름, CIA는 장셴이를 미국으로 망명시키기로 결정했다. 다시 한번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실시하여 ‘이중간첩’ 여부를 최종 확인했다. 조사를 통과한 장셴이에게 그를 전담하던 ‘마크(Mark)’라는 이름의 요원은 “미국 회사에서 일해보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어떤 회사인지,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장셴이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하나뿐인 딸이 함께 갈 수 있다면 미국으로 가겠다.”고만 대답했다. 다른 조건은 달지 않았다. ‘회사’는 동의했고 탈주 계획을 수립했다.

장셴이 일가의 망명이 성사된 것은 이듬해이다. 1988년 1월 9일, 장셴이는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 샤오강(小港)국제공항에서 싱가포르 여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미국 모 기업 직원 신분으로 위장했다. 당시 대만 군 관계자들은 사전 허가 없이 해외로 떠나지 못했다. 장셴이는 우선 가족들에게 휴가를 떠나자고 말한 뒤 1988년 1월 8일 먼저 가족을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로 보냈다. 이후 그는 국가중산과학연구원 원자력연구소에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며 1월 12일에 돌아올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장셴이는 홍콩을 거쳐 유나이티드항공 편으로 미국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의 아내와 세 자녀도 1월 10일 시애틀에서 재회했다. 일가는 미국 국내선을 이용해 1월 12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장셴이의 도주와 장징궈 사망

1월 16일, 장셴이는 데이비드 딘(David Dean) 미재대만협회(美在臺灣協會·AIT) 이사장 겸 주대만 대표를 비롯한 레이건 행정부 고위 관료들을 만났다. 데이비드 딘은 장징궈 사후 하오보춘이 실질 권력을 잡는 데 대한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필요할 경우 하오보춘을 ‘제거’할 수 있다고도 했다. 장셴이는 “하오보춘을 당장 제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며 핵 개발을 저지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셴이는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서도 증거 자료를 제시하며 대만 핵 무기 개발 진척 상황을 증언했다.

데이비드 딘. 하버드대학과 컬럼비아대학 대학원 졸업 후 외교관으로 일했다. 주대만 대사관 영사, 주홍콩 총영사, 주중국 부대사 등을 역임하고 1987년 미재대만협회 이사장 겸 타이베이사무처 대표가 됐다.

1월 12일, 장셴이의 도주 사실이 알려졌다. 출국 전날 그가 남긴 다섯 항으로 이뤄진 ‘사직서’가 사무실에서 발견됐다. 그의 도주로 대만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즉각 추포(追捕)령이 발령됐다. 대만에 남은 일가족에게 국방부 군사정보국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다음 날인 1월 13일, 장징궈 총통이 대량 토혈(吐血) 후 세상을 떠났다. 이를 두고 장셴이의 도주로 충격받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는 해석도 붙었다. 중화민국(대만)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 부총통이 장징궈의 남은 총통 임기를 수행하게 됐다.

장셴이의 미국 망명 소식을 보고받은 하오보춘 참모총장은 CIA의 공작이라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장셴이가 처음부터 포섭된 내부 간첩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하오보춘은 1월 17일 자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셴이 원자력연구소  부소장과 그 가족이 미국으로 도주했다. 미국 CIA 공작이다. 원자력연구소가 핵 연구 활동을 재개했다는 정보를 넘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중산과학연구원 부원장 예창둥(葉昌桐)에게 국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데이비드 딘은 장징궈 총통 조문을 명분으로 타이베이를 찾았다. 리덩후이 총통과 회견에서 그는 핵무기 개발 중단을 강력 요구했다. 딘은 딩마오스(丁懋時) 외교부장, 정웨이위안(鄭為元) 국방부장과 만남에서도 재차 보증을 요구했다. 1월 20일 하오보춘 참모총장과 회견에서 딘은 최후통첩을 했다. “일주일 내에 핵 개발 계획을 중지하고 핵시설을 폐쇄하지 않으면 1954년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을 철회하겠다.”는 압박도 따랐다. 증거 자료로 정찰위성이 촬영한 관련 사진도 제시했다. 하오보춘은 그날 일기에 “딘이 ‘원자력연구소의 핵 무기 개발과 관련 모든 기기들을 파괴하고 대만연구용원자로에 있는 모든 중수를 빼내 이 원자로가 다시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미국은 대만의 평화로운 원자력 사업에 협조할 마음이 있지만 이런 협력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하오보춘은 또 1월 20일 자 일기에 “미국이 협상이 불가능한 문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이 사건은 대만과 미국의 관계에 중대한 사안이다.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모든 기기를 완전하게 파괴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동의한다. 해당 의사를 리덩후이 총통에게 전달할 계획이다.”라고 기록했다.

하오보춘의 ‘8년 참모총장 일기’ 하오보춘이 1981~89년 참모총장(합참의장) 재임시 남긴 일기로서 장셴이 망명 사건 등이 기록돼 있다.

사건 수습 과정에서 하오보춘은 장셴이가 CIA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2월 24일 하오보춘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셴이의 탈출은 CIA가 계획한 불법적인 행동이다. 이는 대만에 수치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대만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런 치욕을 삼키고 지나간 일로 할 수밖에 없다.”

치욕을 감내해야 한다

대만은 1988년 1월 ‘대만연구용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 3월부터는 핵 무기 관련 설비 폐쇄에 돌입했다. 미국 감시단의 감독하에 중수를 빼내 드럼통에 담아 미국으로 보냈다. 사용 후 핵 연료도 유사한 과정을 거쳐 폐기 됐다. 미국은 대만의 핵 시설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핵심 부품과 기기들을 시설의 지하로 옮기고 콘크리트로 지하를 덮었다. 지하를 콘크리트로 덮는 데는 콘크리트 트럭 50대가 동원됐다.

미국은 대만 비핵화 진행 과정에서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확인했다. 이로써 대만이 ‘레드라인(red lie)’을 넘은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사찰과 비핵화 검증 과정을 거쳤다. 당시 IAEA는 이라크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핵 확산 문제가 불거지자 검증 체계를 더욱 강화했다. 대만은 IAEA가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과거처럼 IAEA와 미국 모르게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대만 정부는 원자로 폐기 이유는 경제적 문제 때문이라고 국가중산과학연구원과 소속 과학자들을 설득했다. 국가 중산과학연구원과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대성통곡했다.

장셴이 망명 사건은 대만 정계로도 파급됐다. 우수전(吳淑珍·천수이볜 전 총통 부인) 민진당 입법위원은 대(對)정부 질의에서 사건 책임을 물어 국방부장과 참모총장 해임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대만 핵 무기 개발을 수포로 만든 장셴이에게는 ‘한간(漢奸·민족반역자)’ 낙인이 찍혔다. 군무 무단 이탈죄가 적용되 수배령도 내려졌다.

사건이 수습 국면에 접어든 1988년 8월 2일, 중정이공학원(中正理工學院·현 국방대학 이공학원) 졸업식 공개 연설에서 하오보춘은 비분강개하며 말했다. “장셴이는 반면교재(反面敎材)다. 그는 자신을 배신했다. 국가도 배신했다.” 중정이공학원은 장셴이의 모교로서 물리학과 1회 졸업생이었다.

장셴이의 구술 회고록 ‘원자탄! 스파이? CIA’. 2016년 발간된 책으로서 1970~80년대 대만의 비밀 핵 개발 프로젝트와 이를 둘러싼 미국과 대만의 갈등, CIA의 공작 활동 진상 등이 기록돼 있다.

반면 장셴이는 자신의 행동이 대만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했다. 2016년 12월 출간된 구술 회고록 ‘원자탄! 스파이? CIA(核彈! 間謨? CIA)’에서 자신의 스파이 활동과 망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조국을 배반한 적이 없다. 장징궈 총통도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배반한 상대는 하오보춘 단 한 사람이다.” 덧붙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핵무기 개발은 국가의 존망(存亡)을 좌우하는 중대지사이다. 대만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은 충분했으나, 개발해서는 안 되었다. 야심만만한 군부 강경파 손에 핵무기가 들어간다면 필시 양안(兩岸) 전쟁의 촉매가 됐을 것이다. 국가 백년대계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만의 생존은 미국과의 관계에 달렸다. 핵무기 개발은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망명, 그로 인한 핵무기 개발 좌절은 대만·미국 상호 이익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나는 평화주의자이자 코스모폴리탄이다. 핵은 평화적으로 이용돼야지 전쟁 무기가 돼서는 안 된다.”

1988년 쌍십절(국경절) 열병식에서 사열 받는 리덩후이(좌) 총통과 하오보춘 참모총장(우). 리덩후이는 군부 강경파 수장 하오보춘을 국방부장, 행정원장(국무총리)으로 명목상 승진 시켜 군 통제권을 뺐는다.

민족 반역자? 평화주의자?

장셴이는 워싱턴 근교의 안가(安家)를 거쳐 아이다호주 미국국가실험실(Idaho National Laboratory)에 적을 두었다. 그곳에서 그는 ‘제4세대 원자력발전소’ 연구에 매진했다. 대만 군 검찰은 1988년 장셴이에게 ‘군무무단이탈(軍中逃亡)죄’를 적용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00년 7월, 12년 6개월의 공소시효가 만료돼 장셴이는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

장징궈 사후 리덩후이는 수석부비서장 쑹추위(宋楚瑜·현 친민당 주석) 등 국민당 내 소장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순조롭게 승계했다. 1988년 7월 국민당 주석으로 취임해 대권에 이어 당권도 장악했다.

리덩후이는 미국이 내건 핵 개발 계획 폐기를 순순히 이행해 미국의 신임도 얻었다.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리덩후이는 보수·강경파의 수장 하오보춘에도 손을 썼다. 1989년 12월, 단행된 개각에서 하오보춘은 행정원 국방부장이 됐다. 명목상 ‘영전’이었으나 군 통제권을 잃었다. 이듬해 6월, 하오보춘은 행정원장(국무총리 해당)을 맡으면서 군 통제권을 완전 상실했다. 리덩후이와 갈등을 빚다 국민당도 탈당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