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②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대양에 우뚝 선 韓 해양과학의 첨병

해양주권의 최전선 이어도

이윤정
2023년 03월 11일 오후 6:13 업데이트: 2024년 03월 9일 오전 9:45

이어도는 오늘날 한국의 해양 주권을 상징하는 해양 영토다. 이어도와 그 주변 해역은 중국·일본 등 주변국들과의 배타적 경제수역 확정 문제, 해상 관할권 문제 등이 걸려 있다. 2003년 이어도에 국내 최초로 해양과학기지가 설치된 이래 중국은 해당 수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왔다.
사단법인 이어도연구회가 2022년 발간한 ‘이어도 오디세이’는 이어도 종합해양기지에 관한 그간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러한 주변국의 무리한 권리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를 담은 책이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이어도연구회의 도움을 얻어 책을 바탕으로 이어도에 관한 여러 방면의 이야기를 담은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그 두 번째 순서로 이어도의 실체를 찾는 탐사 과정, 해양과학기지 건설 등을 소개한다.

한국에서 전설 속 환상의 섬으로 구전돼오던 이어도의 실체를 확인한 건 해방 이후 언론보도를 통해서였다. 당시엔 일본식 명칭인 ‘파랑도(波浪島)’란 이름으로 인식됐다.

1947년 10월 22일 동아일보는 이어도를 ‘파랑서(波浪嶼)’로 지칭하면서 “태평양전쟁 패전 후 일본이 파랑서 주변 해역을 자신들의 어업구역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며 “이는 침략적 야욕”이라고 비판했다.

이 보도는 우익 진영 사회단체 우국노인회가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에게 독도·울릉도·대마도·파랑도가 한국 영토로 귀속돼야 한다고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 정부 대응을 주도한 것은 제헌 헌법 초안을 쓴 법학자 유진오였다. 외교위원회 위원이던 그는 역사적으로 영토 주장을 할 수 있는 섬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최남선을 찾아갔다. 최남선은 파랑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목포와 일본 나가사키, 중국 상하이를 연결하는 삼각형 중심쯤 해중(海中)에 ‘파랑도’라는 섬이 있는데, 표면이 얕아서 물결 속에 묻혔다 드러났다 한다. 차제에 그곳을 우리 영토로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의 조언에 따라 한국 정부는 대마도·독도와 함께 파랑도를 영토로 요구했다. 하지만 1951년 9월 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대마도·독도·파랑도가 모두 빠지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만 한국의 영토로 인정됐다. 한국 정부가 미국 측이 요구한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결과다. 한국대표단은 파랑도의 위치조차 적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찾은 이어도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새로운 영토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고,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들이 이어도 탐사에 나서는 결정적 동인이 됐다.

첫 탐사 시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파랑도가 영토에서 배제된 직후였다. 두 번째 이어도 탐사는 1973년 이뤄졌다. 하지만 두 번의 탐사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파랑도 탐사가 재개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다. 이번엔 민간이 나섰다. KBS 방송국이 탐사를 제안하고 제주대학교 해양대학 교수진이 힘을 합쳤다. 1차 조사단은 파랑도 위치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으나 기상 악화로 학술조사는 하지 못했다. 언론인과 국립수산진흥원, 해양연구소 전문가들이 합류한 2차 조사단은 마침내 파랑도의 규모, 수심, 지질, 생물 등에 대한 측량·탐사에 성공했다.

당시 탐사 활동은 미디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고, 탐사 내용은 전국적으로 보도됐다. 한국해양소년단 제주연맹 탐사대는 1984년 4월 7~9일 이어도의 실체를 재확인하고 제주도의 정체성을 살려 파랑도 대신 ‘이어도’란 명칭을 사용했다.

이후 건설교통부 수로국은 1986년 10월 이어도 해역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이어도에 고정 구조물을 설치하기 위한 정밀측량 목적이었다. 해운항만청은 1987년 11월 ‘이어도 등부표(선박 항해 위험을 알리는 항로표지 부표)’를 설치했고 이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표했다.

1995년엔 해양수산부가 해저지형 파악과 조류 관측 등 해양과학기지 설치 사전작업에 착수했다. 1990년대 후반 한·중 어업협정 교섭 과정에서 이어도 주변 수역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 여론화됐다. 이에 따라 제주도는 1999년 5월 이어도에 수중 표석을 세워 이어도 수역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호소했다. 표석에는 ‘제주인의 이상향 이어도는 제주땅’이라 새겼다.

이어도 수중 표석 | 이어도연구회 제공

국립해양조사원은 2000년 12월 30일 ‘이어도’를 지명 고시함으로써 마침내 공식 명칭으로 통용되게 됐다.

대양에 우뚝 선 한국 최초의 해양과학기지

한국은 3개 해양과학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 1호가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다.

해양과학기지 건설 구상은 1984년 이어도의 실체가 확인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이어도 해역은 바람과 파도가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난류와 한류가 섞이는 해역이라 해무도 잦다. 더구나 해마다 십여 차례 발생하는 태풍의 길목이다. 지진 발생 가능성도 있다.

악천후 바다 한복판에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세우는 일은 한국은 물론 세계 최초 도전이자 난공사였다. 육지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에 철골 해양 기지를 지은 일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설계부터 제작·설치·운영 등 모든 과정이 한국 독자 기술에 의해 시행됐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의 일차적 기능은 해양과학 연구 플랫폼이다. 다만 이어도 기지는 기본적으로 무인 운영시스템이며 상주해 시설을 지키는 방호인력이 없다. 연구자들은 정기적으로 기지에 머물면서 점검하거나 각종 연구·탐사 활동을 한다.

기지에서 생산되는 이어도 해역에 대한 관측자료들은 인공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국립해양조사원에 전송된다. 이들 관측자료는 분석·가공을 거쳐 육상 기상예보·해양예보·어장예보에 활용되며 기상청 외 소방방재청, 해군작전사령부 등에도 제공된다. 해상교통 안전, 지구환경 변화 분석, 해양생태계 변화, 해양 재해 현상 이해와 대응 등을 위한 연구자료가 된다.

이어도 주변 해역은 한·중·일 어선들이 많이 조업하는 어장이다. 연간 수십만 척의 선박이 항해하는 해역으로 해상사고의 위험이 상시 도사리고 있다. 이어도 기지는 안전 항해를 위한 항로표지 역할을 한다. 해난사고 시 헬기를 활용한 인명구조의 거점 역할도 한다. 최근에는 중국으로부터 불어오는 미세먼지와 대기오염물질의 조성과 분포, 이동을 파악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국 어선이 기지 주변에 버린 폐그물을 수거하는 작업 | 이어도연구회 제공

이어도 기지는 고파랑, 강풍속 등 악조건에 장기간 노출된 해양구조물이다. 안정성 대책을 위해 늘 구조물의 안전성을 계측, 점검하고 그 동적 특성을 분석한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대중에게 개방돼 있지 않지만, 네이버 항공뷰·거리뷰로 누구나 기지 안팎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국립해양조사원은 첨단 장비로 촬영한 기지 전경과 내부 파노라마 영상을 제공해 마치 기지에 있는 것처럼 실시간 현장 모습을 둘러볼 수 있게 했다. 또 무인항공기로 촬영한 영상으로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수중 이어도와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를 관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