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에 민감해진 여론, 윤석열 정부가 마주한 도전

한동훈
2022년 07월 25일 오후 3:00 업데이트: 2022년 07월 26일 오전 11:29

뉴스분석

미국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UC 버클리대 석좌교수가 자신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프레임 이론을 설명하며 “상대방의 언어로 생각하면 그들의 프레임에 조종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레이코프 교수는 언어가 생각을 좌우하는 예로 미국 공화당의 ‘세금 구제’를 예로 들었다. 감세정책을 ‘세금 구제’로 부르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 정책이 고통(=세금)을 없애주는 긍정적 정책으로 여기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감세를 반대하는 정책을 만들면서도 ‘세금 구제’라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공화당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세금 구제를 비판하더라도 ‘세금=고통’이라는 프레임에 더 갇힐 뿐이라는 것이다.

레이코프 교수는 보수진영의 프레임 전략에 말려드는 진보 진영을 일깨우고 진보 진영의 선거 승리를 위해 이 책을 썼다. 이는 책이 출간된 200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그해 미국의 보수당인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진보당인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프레임은 보수진영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수십 년째 벌어지고 있었다.

중국사회의 진보를 주장하며 공산주의 혁명을 내세운 중국 공산당은 일찌감치 언어를 통한 사유 통제에 집중했다. 대표적 사례의 하나가 마오쩌둥의 ‘대장정’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창정(長征·장정)’으로 불린다.

국민의 ‘언어’를 바꾼 사회주의 정권

한국에서도 오랜 기간의 활동 혹은 장거리 이동을 표현할 때 흔히 쓰이는 말인 ‘대장정’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군(홍군)이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1만2500km를 걸어서 옌안으로 탈출한 사건을 가리킨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장정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2016년 8월 8일 온라인판 기사에서 장정이란 명칭의 유래에 관해 밝혔다.

이에 따르면 장정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5년 홍군 정치부 선전대에 의해서였다. 그전까지는 ‘장거리 행군과 전투’, ‘원정’, ‘자리 옮김(轉移)’이라고 불렀다. 생사 존망의 갈림길에서도 활발했던 정치 선전은 공산당이 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잘 보여준다.

에포크타임스의 시리즈 평론 ‘9평공산당’의 제2평 ‘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일어섰는가’ 편에서 장정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33년 10월부터 1934년 1월까지 제5차 포위망 탈출 전투에 실패하고 농촌정권도 잇달아 잃어버려 근거지가 갈수록 축소됐다. 중앙 홍군(붉은 군대)은 할 수 없이 도주해야 했다. 이게 ‘장정’의 진짜 기원이다.”

중국 공산당은 또 ‘북상(北上) 항일’을 장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국민당군의 토벌작전에 밀리면서도 북상하며 항일 전쟁을 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물론 또 다른 당의 언어였다. 탈주극을 항일 전쟁으로 바꾼 정치선전이었다.

공산당은 언어를 변질시켜 사유를 통제하는 행위를 1949년 정권 수립 이후에도 지속했다. 공산당을 비판하는 이들도 당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넘쳐나는 신조어에 공산당을 비판하는 이들도 신조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의 언어로 당을 비판하니 비판은 속빈 강정이 됐다.

예를 들어 ‘중국특색’은 중국만의 특징이라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실상은 비정상적인 사회를 가리기 위한 핑계다. ‘당 엄마(黨媽)’는 낳아준 부모보다 당이 더 친근하고 가깝다는 의미다. 개혁의 아들딸을 만들기 위한 세뇌용어다. 당 엄마라는 용어를 비판할수록 당 엄마라는 이미지만 더 부각된다.

공산당은 다양한 구호도 만들어냈다. “당이 하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구호는 요즘 한국 온라인에서 쓰이는 ‘무지성(無知性) 지지’와 통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당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구호다.

지난 세기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쓰인 구호와 같은 의미를 지닌 새로운 용어들이 한국에서 통용되는 현실이 놀랍다.

신조어 범람하는 한국 정치, 문제는 없나

현재 한국 정치계에는 신조어가 범람하고 있다. 물론 특정 이슈를 단번에 알 수 있게 전달하는 신조어는 정치판에서는 늘 생겨나고 사라져왔다.

그중에는 ‘검수완박’처럼 긴 용어를 부르기 쉽게 한 단어로 축약한 말도 있지만, 일부 신조어는 의미가 모호해 본질을 흐리고 왜곡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23일 ‘서울경제’에 쓴 칼럼에서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인 ‘사적 채용’을 ‘정의가 불분명한 말’이라고 진단했다.

신 교수는 “사적 채용이라는 용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며 “정의조차 불분명한 용어를 사용하며 상대를 비판하면 어떤 부분을 비판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사적 채용이 비판하는 부분을 ‘채용 방식’과 ‘채용한 공무원의 능력’ 등 2가지로 나눠 분석한 뒤 둘 다 정당한 비판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사적 채용이 ‘채용 방식’에 대한 비판일 경우, 대통령실 직원은 공개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비공개 채용, 사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채용은 지금까지 청와대의 관행이었다.

사적 채용이 ‘채용한 공무원(별정직)의 능력’에 관한 비판이라면 어떠한 결격사유가 있는지 밝히면서 문제를 제기해야 정당한 비판이 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기된 비판은 대부분 결격 사유가 아닌 ‘사적인 관계’로 채용됐다는 점에만 집중됐다.

의미가 불분명한 용어가 사태 과장에 쓰인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유튜브 채널 ‘시사저널TV’에서 사적 채용 논란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이 사안을 과장해서 공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만, 국민의힘이 똑같이 맞서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대통령실에서 별정직 공무원을 사적인 인연에 따라 비공개 채용한 것이 문제라면 대다수 국회의원 역시 같은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국회의원의 보좌직원과 수당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보좌진(별정직 공무원)을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 유급인턴 1명 등 총 9명까지 뽑을 수 있다.

이들 보좌직은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다가 의원이 당선되면 해당 의원실에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경우가 흔하다.

의원실에서 공개채용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의원이 자신과의 이런저런 인연 혹은 전문성을 보고 선발하는 일도 많다.

사적 채용이란 용어가 윤석열 정부와 관련해 정치권과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달 15일이다.

다수 언론에 따르면 이날 용산 청사에서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가 기자들과 김건희 여사의 봉하마을 방문에 관한 질의응답을 주고받던 중 김 여사의 회사 코바나컨텐츠 출신 직원 2명이 대통령실에 채용됐다는 내용이 나왔다.

이어 기자들 사이에서 ‘과거 어떤 대통령 부인이 그렇게 사적으로 청와대에 채용을 했느냐’라는 추가 질문이 나오자, 이 관계자가 “사적인 인연으로 채용했다는 건 어폐가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언론들은 대부분 이를 “사적 채용했다는 건 어폐가 있다”로 줄여서 기사를 냈고 다음 날 더불어민주당의 한 당직자가 “명백한 사적 채용”이라고 비판하면서 사적 채용이란 용어가 굳어졌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오히려 코끼리를 더 생각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지난달 15일부터 시작해 보수정당은 한 달 이상 사적 채용 논란에 휘말렸다.

코바나컨텐츠 출신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 외가 6촌,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 앞 시위를 벌인 유튜버의 누나, 윤 대통령 지인의 아들로까지 채용 논란이 확산했다.

논란은 현재 잠시 소강상태다. 행정안전부가 경찰국 신설을 추진하자 간부급 경찰들의 집단행동으로 대응하면서 정치권과 언론, 여론의 시선은 이제 경찰로 향하고 있다.

다만, 이번 사적 채용 논란을 통해 우리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공정성에 대한 감수성이 민감해졌음이 확인됐다.

공정성은 지난 정부가 내세운 주요 가치이자 현 정부가 계속 풀어야할 과제가 됐다. 사진은 박성중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과학기술교육분과 간사. |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의 유산과 새 정부의 숙제

공정은 평등, 정의와 더불어 문재인 전 정부가 강조한 가치이자 국정 목표였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고 이 문구는 정권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진보 정부였던 문재인 전 정부는 집권 5년 만에 보수 정부로 교체됐다. 집권 말에는 공정성 시비도 일었다.

공정성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이기도 하다.

옆 나라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생산 수단 공유와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며 정권을 잡았지만, 지난 20년 가까이 빈부 격차와 양극화가 심화되기만 했다.

지난해 중국의 지니계수(부의 불평등 지수)가 최대 0.47이라는 사실을 공산당 중앙 재경위원회의 8월 10차 회의에서 시인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사적 채용은 진보 정부 청와대나 국회에서도 관행적으로 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일부 보수 언론의 문제 제기에도 큰 논란으로 번지진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선 보수 정부에서 공정성은 집권 100일도 되지 않아 야당에서 ‘탄핵’을 언급할 정도로 파괴력 있는 주제로 부각됐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2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며 “사적 채용, 측근 불공정 인사 등으로 드러나고 있는 대통령 권력의 사유화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며 윤 대통령을 우회 비판했다.

박 원내대표의 발언은 사적 채용이 공정성과 관련된 이슈라는 시각을 엿보게 한다. 사적 채용에 대한 민주당의 뜨거운 반발은 공정성의 가치를 내세운 정당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공세이기도 했다.

공정은 자유와 대립하진 않지만, 공정은 평등과 연결되고 자유는 평등과 부딪친다. 즉 공정과 자유, 이 두 가치는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차례 언급했다. 공정은 “공정한 교육” “공정한 규칙”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에서 총 3번 등장했다.

문재인 정부는 여러 유산을 남겼지만, 공정성에 관한 우리사회의 예민한 감수성도 그 가운데 하나다.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어떻게 공정을 조화시킬 것인지는 윤석열 정부의 풀기 힘든 숙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