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 “김건희 녹취록 보도는 선택적 공익”

최창근
2022년 01월 18일 오후 5:34 업데이트: 2022년 01월 18일 오후 6:10

 “김건희 보도는 선택적 공익” “공영방송 MBC가 유튜브 방송 하청 노릇”
“방송 민주화는 진보 편드는 것 아냐… 정치적 갈등 해소, 국민 통합에 보탬 돼야”

진보성향 언론학자가 MBC의 김건희 씨 7시간 통화 녹취 보도를 두고 “선택적 공익”이라 비판했다.

1월 18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MBC, 이게 방송 민주화인가?’라는 중부일보 칼럼에서 “나는 ‘김건희 녹취록’ 논란은 김건희와 윤석열의 자업자득이라고 보기 때문에 ‘정치적 공방’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건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라고 썼다. “MBC가 아니어도 녹취록 방송은 어차피 다른 매체들에 의해 이루어질 텐데 왜 굳이 공영방송이 ‘두 개로 쪼개진’ 공론장의 한복판에 사실상 어느 한쪽을 편드는 역할로 뛰어들어야 하느냐”며 “이게 6년 전 MBC 기자들이 그토록 울부짖었던 방송 민주화인가”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강준만 교수는 “이틀 전 MBC는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모은 ‘김건희 녹취록’을 방송했다. 국민의힘은 “김씨 동의를 얻지 않은 불법 녹취”라며 법원에 보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도 금지 가처분과 같은 ‘사전억제(prior restraint)’는 언론 자유를 해칠 수 있으므로 언론이 결사 반대하고 법원이 가급적 언론의 손을 들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라고 전제한 후 MBC 보도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건 언론사 자체 취재 기사일 경우다. MBC는 사실상 편집과 배포의 역할만 맡았을 뿐 알맹이인 녹취록은 유튜브 채널 서울의소리로부터 건네받은 것이다. 유튜브에 압도당하는 지상파 방송의 몰락을 시사하는 상징적 사건인가? MBC가 지상파의 자존심을 버리고 작은 유튜브 채널의 ‘하청’ 역할을 맡은 건 겸손으로 이해하기로 하자. 녹취와 관련된 언론윤리의 문제도 그냥 넘어가자. 나는 ‘김건희 녹취록’ 논란은 김건희와 윤석열의 자업자득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건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다.”

마지막으로 강준만 교수는 “방송 민주화는 진보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다. 보수는 반드시 이겨야 하거나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MBC 방송강령은 “사회 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불편부당한 공정방송에 힘쓴다”고 돼 있지 않은가. 처음에 천명한 원칙과 정신에 충실한 것이 방송민주화다. 나는 MBC가 더 멀리 내다보면서 현재 살벌한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 화합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본분에 충실해주면 좋겠다”라며 공영방송으로서 MBC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주문하며 글을 마무리했다.

앞서 강준만 교수는 민주당 정부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2021년 6월 펴낸, 1인단행본 ‘THE 인물과사상 01’에서 문재인 정부의 치명적 실수로 ‘윤석열 악마화’를 지적했다. 강 교수는 “윤석열에게 대통령 자격이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라며 거리를 두면서도 “윤석열의 정치 참여에 대한 더 큰 책임은 추미애와 문재인에게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했다. 여권이 비상식적으로, 또 과도하게 윤 전 총장을 견제·비판한 탓에 몸집이 커졌고, 그 결과 현 정부 개혁 명분과 쇄신 동력이 소진됐다는 지적이다. 이어 강 교수는 “‘성찰 있는 민주당 쇄신’은 이미 물 건너간 것 같다”며 “무엇보다도 민주당 사람들이 ‘윤석열 악마화’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라며 “윤석열의 미래를 잘 꿰뚫어본 여권 사람들이 어쩌자고 ‘수구 세력의 대권주자’로 가는 길을 열심히 닦아 줬는지 모르겠다. 윤석열을 ‘물불 안 가린 건달 두목’으로 보고 싶다면, 뭘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라고 썼다.

전남 목포 태생의 강준만 교수는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후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저널리즘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89년부터 지난해까지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8년 국내 첫 인물 실명 비평 잡지 ‘인물과 사상’을 창간하여 발행인을 맡았다. 이 밖에 왕성한 저술·기고 활동을 통하여 논객·평론가·저술가로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