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장쩌민파 지방세력의 몰락-톈진편

샤샤오창(夏小強)
2017년 06월 20일 오후 3:12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25

시진핑  집권  이전,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정부는  10년 간  어떤  정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령불출 중난하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 현상)’의  주 원인은  장쩌민파가  각  성(省)‧시(市)의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상당수의  도시가  장쩌민파의  ‘독립왕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  주석은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전국  31개  성(省)‧시(市)  주요  보직에  모두  측근들을  배치하는 등 인사  개혁을  단행했다.  전국에 퍼진 장쩌민파  지방 세력은 이미 19차  당대회  전부터 패산할  위기에  놓였다.

중국 북부에 위치한 톈진시(市)는 동쪽으로 보하이(渤海), 북으로 옌산(燕山)을 끼고 있는 수도권 출입 통로이자 경제도시다. 근대 이후 정치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돼 중국 공산당의 정치 세력 판도에서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에 이은 정치적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6.4 톈안먼학살 이후 장쩌민(江澤民)이 정권을 잡으면서 톈진 관료계의 주요 보직은 장쩌민파로 채워졌다. 1998년에서 2016년까지 장리창(張立昌), 장가오리(張高麗), 쑨춘란(孫春蘭), 황싱궈 등이 톈진 시위원회 총서기직을 거쳤다.

톈진 정계의 1차 붕괴

2006년, 상하이 사회보험 사건과 함께 톈진 정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6년 6월 12일, 당시 톈진 시위원 정법위 부서기이자 시 검찰원 검찰장이었던 리바오진(李寶金)이 ‘쌍규(雙規·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기율위의 조사를 받는 처벌) 처분을 받은 것이다. 2007년 그는 뇌물 수수 및 공금 횡령죄로 사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007년 6월 4일, 쑹핑순(宋平順) 전(前) 톈진 정법위 서기 겸 톈진 정치협상회 주석이 사무실에서 자살했다. 쑹핑순은 장기간 톈진 정법계통을 장악해 왔다. 자살과 관련해 ‘칼로 목을 그었다, 목을 맸다, 추락사했다, 음독했다, 총기로 자살했다’는 등 여러 소문이 돌았다. 어떤 언론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단단히 묶어 질식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입막음 당했다는 소식도 돌았다. 소식에 따르면, 6월 4일 저녁 무렵, 당시 중기위 서기인 우관정이 쑹핑순을 찾아 2시간 동안 담화하며 쑹핑순이 자신의 비리에 대해 ‘확실하게 해명’ 하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우관정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쑹핑순이 자살한 상태로 발견됐다.

2008년 1월 10일, 장리창 톈진시 前 당서기가 병사했다. 중국 공식 자료에 따르면 장리창은 1985년 10월에 톈진시 부시장에 임명됐다. 1989년 9월 톈진시 부서기 및 부시장으로 승진했으며, 시 항구관리처 주임을 겸임했다. 1993년 6월 톈진시장에 정식으로 당선되었고, 5년 후 톈진시 당서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주임에 임명됐다.

1999년 국제 사회를 뒤흔든 ‘4.25 파룬궁수련자 평화대청원’은 장쩌민이 7월 20일부터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도화선이었다. ‘4.25 평화대청원’ 사건은 톈진 공안국이 현지 파룬궁 수련자를 체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정법위 서기였던 뤄간(羅幹)을 도와 ‘4.25’ 사건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톈진시 장리창 서기, 시 공안국 쑹핑순 국장, 시 공안국 우창순(武長順) 부국장 등이었다.

장리창이 병사한 뒤, 장쩌민파의 주요 인물인 장가이리가 톈진시 서기직에 임명됐다. 2012년 제18차 당대회 이후에는 쑨춘란이 뒤를 이었으며 2014년 12월 황싱궈 톈진시장이 대행했다. 이렇듯 톈진은 줄곧 장쩌민파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시진핑, 톈진의 여러 ‘호랑이’ 숙청

제18차 당대회 이후, 톈진 관료계의 정화 작업은 계속됐다. 여러 ‘대형 호랑이’들이 연이어 낙마했는데, 전(前) 톈진 공안국 국장 우창순, 톈진시 부시장 겸 안전감독총국장 양둥량(楊棟梁), 톈진시 부시장 인하이린(尹海林), 톈진 대리 서기 겸 시장 황싱궈 등 청국(廳局·국장)급 및 그 이상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2017년 5월 27일 전(前) 톈진 정치협상회 부주석이자 공안국 국장인 우창순이 ‘부패, 뇌물수수, 공금횡령, 기관 비리, 직권남용, 사익 도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014년 7월 20일 당국은 우창순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우창순은 44년간 톈진시 공안계통에서 일했고, 이 중 11년을 공안국 부국장 겸 공안교통관리국장으로 있었다. 11년간 톈진시 공안국장으로 있으면서 톈진시 관료계와 상업계에 넓은 인맥을 만들어 톈진에서 ‘우예(武爺, 우 나리)’로 불리기도 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시 주석은 중앙기율위의 한 회의에서 우창순 사건에 대해 “(톈진에) 우 나리가 있는데, 톈진의 주차장이 모두 그의 것이더라. 무법천지다. 18차 당대회 후에도 기세가 여전해 전대미문이다”라고 말했다.

우창순이 수차례 위기에도 불구하고 출세가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저우융캉(周永康)의 비호 덕분이라고 차이신넷(財新網)은 보도했다. 쑹핑순 사건 발생 후 우창순은 관련 부처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당시 중앙 정법위 부서기였던 저우융캉은 베이징 올림픽 안전을 이유로 그를 비호했고 이 같은 사실은 여러 소식통을 통해 알려졌다.

우창순은 1999년 ‘4.25 사건’ 발생의 실질적 주도자이며 핵심 인물이다. 당시 그의 상사였던 톈진부시장 겸 시 정법위 서기, 시 공안국 국장이었던 쑹핑순, 전(前) 정법위 서기 뤄간 등은 ‘4.25 파룬궁수련자 평화대청원’을 ‘파룬궁의 중난하이(中南海) 포위 사건’으로 조작하는 계획에 직접 참여했다.

우창순은 장쩌민의 명령에 따라 톈진의 파룬궁 수련자를 잔혹하게 박해했다. 톈진 공안국장 재임 시절 전력을 다해 파룬궁 수련자를 박해하고 불법으로 체포 구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2016년 8월 22일, 인하이린 톈진 부시장이 낙마했다. 그가 낙마한 뒤, 당시 장가오리 톈진시 서기와의 관계가 세상에 밝혀졌다. 현재 상무위에 재임 중인 장가오리는 2007년 3월부터 2012년 11월에는 톈진시 서기를 역임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시 규획국(規劃局) 부국장이었던 인하이린이 부시장까지 고속 승진했던 것이다.

2016년 9월 10일, 톈진시 대리 서기 겸 시장인 황싱궈가 중대한 기율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황싱궈는 관료 생활 중 시 주석과 함께 근무한 경력이 있지만, 정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쩌민, 쩡칭훙의 사람으로 분류한다. 황싱궈는 저장(浙江) 닝보(寧波) 시위원회 서기직으로 재임할 당시, 닝보 고속도로의 각 출구마다 거대한 장쩌민의 초상화을 세워 놓았었다. 장쩌민이 전면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던 1997년, 갓 40세를 넘긴 황싱궈는 이미 저장성 정부 비서장이었으며, 부성장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한 보도에 따르면, 황싱궈는 장쩌민에게 아첨하는 것을 통해 고속 승진할 수 있었다. 황싱궈와 장가오리는 무척 가까운 사이로, 톈진 정계 안팎으로 서로 밀고 끌어주는 관계로 알려졌다.

황싱궈에 앞서 이미 수십 명의 톈진 시 관료들이 부패 혐의로 낙마했다. 또 중앙기율위 감찰부 야오쩡커(姚增科) 부부장이 ‘낙하산’으로 톈진 기율위 서기직에 임명되면서 톈진에서는 최소 48명의 청국(廳局)급 관료가 낙마했다.

시진핑, 톈진 관료계 재정비

2016년 9월 13일, 황싱궈 톈진시 대리서기가 낙마했다. 3일 뒤 리훙중(李鴻忠) 전 후베이(湖北)성 서기가 급히 톈진으로 발령받았다.

리훙중은 정치 경력 상 장쩌민파로 분류할 수 있다. 장쩌민의 정부 황리만(黃麗滿)이 그를 발탁한 것이다. 그는 황리만의 심복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또한, 보시라이(薄熙來)를 본받아 후베이성에서 ‘혁명 가요 다시 부르기’의 ‘창훙(唱紅)’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후에 보시라이의 정변 음모가 탄로나자, 리훙중은 형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후베이 지역의 ‘창훙’ 운동을 급히 중단시켰다.

2012년 4월, 리훙중은 저우융캉을 직접 수행하면서 이창(宜昌)과 우한(武漢) 등지를 ‘시찰’했다. 그러나 저우융캉이 낙마하자 시 주석에게 충성을 보이면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2014년 12월 22일, 중앙 정부가 링지화(令計劃)를 조사하는 중이라고 발표하자 리훙중이 이끄는 후베이성(省)이 중앙의 결정을 옹호한다고 표명한 첫 번째 성이 됐다. 이는 다른 성(省)들이 링지화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 모범을 보여 줬다. 리훙중은 후베이성 상무위 회의에서 시 주석이 중국 공산당 중앙 ‘영도핵심(領導核心)’이며, 당원 간부들은 “자발적으로 시진핑 영도핵심을 위주로 시진핑을 향해 정열(看齊)’ 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2012년 말 시 주석이 중국 최고 지도자에 오른 뒤 당내 고위 관료로부터 ‘영도핵심’으로 불린 첫 번째 사례이다. 따라서 리훙중의 톈진 발령은 과도기에 놓인 톈진 관료계에 안정을 꾀하고, 리훙중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시 주석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2016년 9월 14일, 왕둥펑(王東峰)이 톈진시 부시장 겸 대리 시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출신으로, 2004년 7월 전까지 줄곧 산시성에서 근무해 왔다.

2013년 4월, 9년 가까이 중국 국가공상총국 부국장직을 지낸 왕둥펑이 돌연 톈진으로 배치되 허리펑(何立峰) 톈진시 부시장 직무를 대체했다. 일부 해외 중국어 언론은 왕둥펑과 시 주석이 산시 출신으로 동향이며, 현임 리잔수(栗戰書) 당 중앙 판공청 주임과 직무를 함께 한 경력이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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