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군부 최고위직 ‘팡펑후이’, 쿠데타로 시진핑에 대항한 내막

리무양(李沐陽)
2018년 01월 13일 오전 7:59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24

팡펑후이(房峰輝)가 낙마한 가운데 중국 공산당이 이를 공식 발표한 시점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중국 당국은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41일 만에 낙마 사실을 발표했다. 팡펑후이는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60주년 열병식 총지휘를 맡은 바 있으며 7대 군구 사령관 중 최연소로 베이징군구 사령관을 지냈고 중앙군사위 연합참모부 초대 참모장을 맡은 스타 장성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는 출세 길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팡펑후이의 낙마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을 다시금 떠오르게 만든다. 현재 중국 국방부 공식 홈페이지에는 그에 관한 내용은 비공개로 처리되었으며, 미처 삭제되지 못한 일부 게시물의 제목만 남아 있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팡펑후이는 1951년생으로 산시(陝西)성 빈(彬)현 출신이다. 1968년에 입대해 말단에서부터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복무 기간 대부분을 참모 업무를 담당하며 보냈다. 전환점은 그의 나이 56세에 이르러 찾아왔다 2007년 중장이던 팡펑후이가 베이징군구 사령관으로 승진해 수도 경비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7대 군구 사령관 중 최연소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2010년 7월 팡펑후이는 상장으로 승진하고 2012년 총참모장을 역임하면서 중앙 군사위원이 됐다. 2016년 1월, 군사위 기관 조정으로 팡펑후이는 군사위 연합참모부 초대 참모장에 임명됐다.

팡펑후이는 2009년 중국 공산당 건립 60주년 열병식 총지휘를 맡으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가 이를 맡게 된 것은 베이징군구 사령관이 열병식의 총지휘를 담당한다는 군의 관례에 따라서였다.

당시 팡펑후이는 베이징군구 사령관으로 재직하며 후진타오(胡錦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열병식 지휘까지 맡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은 중국 각종 뉴스 포털의 메인을 장식했다. 언론은 팡펑후이를 ‘군사계의 눈에 띄는 샛별’이라는 평가를 쏟아냈다. 이후 그는 총참모부 총참모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한 번 높아진 지위를 과시했다.

2015년 시진핑이 군 개혁을 실시하면서 총참모부의 권한은 대폭 축소됐다. 2016년 초 군사위 기관은 기존의 4개 총부에서 7개 부(청), 3개 위원회, 5개 직속 기구 등 15개 직무 부처로 개편됐다. 그중 군사위 연합참모부는 팡펑푸이가 초대 참모장을 지낸 부처였다. 이로 인해 그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지만 이때까지 낙마 조짐은 포착되지 않았다.

2017년 8월 26일 팡펑후이가 군사위 연합참모부 참모부장을 사임했으며 이 자리에 리쭤청(李作成) 전 육군 사령관이 임명됐다는 소식이 국방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팡펑후이의 거취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가 19차 당대회 군 대표에서 탈락하면서 낙마설은 확산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뉴욕 민주인사인 왕쥔타오(王軍濤)는 글을 통해 2016년 7월 중하순 경부터 쑨정차이(孫政才) 실각, 징시(京西)호텔에 개최된 이른바 ‘삼무(三無)’ 회의(펜, 종이, 물컵이 없는, 듣기만 하고 기록 불가), 네이멍구(內蒙古)에서 열린 대열병식 등 시진핑 주석이 특이한 행보를 보여 왔다고 지적했다. 왕쥔타오는 시 주석의 이러한 움직임이 정변 미수사건을 진압했거나 조직 중이던 정변을 제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시 주석은 이미 군대 내 ‘호랑이 사냥’를 추진하며 ‘궈보슝(郭伯雄), 쉬차이허우(徐才厚)의 잔재를 말끔히 청소하자’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팡펑후이와 당시 총정치부 주임이었던 장양(張陽)은 자신들의 오랜 동기와 동향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이를 눈치 챈 시진핑 주석은 팡펑후이와 장양에게 불만을 가졌으며 그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왜 시진핑에게 불만을 가졌을까? 팡펑후이의 ‘후견인’이 바로 그의 매형인 궈보슝이고, 장양의 ‘은인’이 쉬차이허우였기 때문이다. 궈보슝과 쉬차이허우는 장쩌민(江澤民)이 발탁한 인물로, 장은 그들을 통해 후진타오의 실권을 빼앗고 군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공산당은 줄곧 ‘총구에서 정권이 나온다’고 말해왔다. 군권을 장악하는 것이 곧 모든 권력을 손에 넣는다는 것이다. 시진핑이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을 실각시키면서 이들 중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투옥됐다. 이를 본 팡펑후이와 장양은 어떤 기분이겠는가? 그 심적 괴로움은 어떠하겠는가?

팡펑후이와 장양은 18대 이후 ‘문제가 있음에도 발탁(帶病提拔)’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지난 5년 간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시진핑 핵심’을 옹호하면서 내심 자신들의 ‘주군’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진핑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이와 관련해 시사평론가 저우샤오후이(周曉輝)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진핑 주석의 해외 순방 때마다 중국 군대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고 심지어 군사 정변의 소식까지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중국군 내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팡펑후이가 이러한 일들과 전혀 관련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우샤오후이 평론가는 이는 너무나 자명한 일들이라고 말했다.

작년 중국 19차 당대회 전에도 중국과 인도 국경에서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발생한 바 있었다. 당시 팡펑후이는 군사위 고위직에 있었다. 얼마 전 <힌두스탄 타임즈(Hindustan Times)>는 대치 상황을 끝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팡펑후이라고 암시적인 보도를 내놓았다. 중국-인도 간 철군 협의는 팡펑후이가 연합참모부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후에야 마무리됐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시진핑을 불안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지뢰를 두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 언론은 시진핑이 당초 팡펑후이와 장양을 ‘19차 당대회’ 군사위 임기 교체 기간에 조기 퇴직시킬 계획이었다고 보도했다. 둘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조기퇴진이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요직에 앉아 탐욕이 절정에 달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홍콩 언론은 팡펑후이와 장양이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대로 실각되기보다 차라리 먼저 공격하자는 합의를 보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둘은 군사 정변을 모의하고 ‘19대’ 이전에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보가 유출되면서 정변은 시도조차 못하고 막을 내렸다. 시 주석이 둘을 체포하면서 군사 쿠데타의 음모는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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