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6중전회서 장쩌민 부정 평가했지만 장가오리가 막았다”

뤄야(駱亞), 닝하이중(寧海鐘)
2021년 11월 23일 오후 6:54 업데이트: 2021년 11월 25일 오후 2:19

시진핑 격분…이후 장쩌민 옹호한 장가오리 스캔들 확산
스캔들 폭로한 펑솨이, 잠적설 끝 무사한 모습으로 복귀

고위층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뒤 잠적설이 돌았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彭秀·36)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펑솨이의 폭로 게시물은 20분만에 삭제됐고 바이두에서 펑솨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동명이인 등 그녀와 무관한 내용들만 검색되지만 사건 자체는 CGTN(CCTV 해외채널), 환구시보 편집장 후시진 등 관영매체나 언론인들을 통해 언급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성폭행한 인물로 지목한 고위층은 상하이방 핵심 인물인 장가오리(張高麗·75) 전 중국 국무원 부총리다. 중국 공산당(중공) 고위층 스캔들 보도가 거의 통제되는 중국에서 이 사건이 이 규모로 커질 수 있었던 이유는 국제사회의 관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상하이방은 중국 체제 내 시진핑의 최대 정치적 라이벌인 ‘장쩌민(江澤民·전 국가주석)파’를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

즉 장쩌민파 핵심 인물에 대한 스캔들이 전 세계를 돌아 중국 내부에까지 널리 보도됐다는 점은 현 집권 세력의 ‘의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중국 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일각에서는 시진핑이 장쩌민파에 날린 최후의 일격이 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그만큼 묵직한 공격이라는 의미다.

호주로 망명한 중국 법학자로 중국 전문가로 활동하는 위안훙빙(袁紅冰)은 에포크타임스에 이 사건이 중공 고위층의 권력 투쟁과 얽혀 있다며 장가오리가 시진핑의 눈밖에 난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위안훙빙은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시진핑이 (이번 세 번째 역사결의에서) 장쩌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려 했으나, 장가오리가 나서서 장쩌민을 변호했다”며 “이 일로 시진핑이 격노했다”고 말했다.

장가오리는 2013년에서 2018년 사이 중국 공산당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한 명이었다.

펑솨이는 이 사건을 폭로한 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국 관영 매체 CGTN은 지난 18일 “펑솨이가 세계여자프로테니스협회(WTA)에 보낸 이메일을 입수했다”며 펑솨이는 현재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WTA 투어 스티브 사이먼 대표는 “그 메일을 실제로 펑솨이가 썼는지 믿기 어렵다”며 “오히려 펑솨이의 안전과 행방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고 했다.

이 사건은 6중전회가 개최되기 직전에 터졌다. 이번 6중전회에서 중공은 세 번째 역사결의를 채택하면서 중공의 역사를 3단계로 확정했다. 즉 마오쩌둥이 통치한 시기를 1단계로, 덩샤오핑(鄧小平)·장쩌민·후진타오(胡錦濤) 시기를 묶어서 2단계로, 시진핑 시기를 3단계로 정했다. 그리고 시진핑은 3단계를 ‘신시대’로 명명하고 자신을 1세대 지도자로 확정했다. 이번 결의는 시진핑의 차기 연임을 위한 포석으로 여겨진다.

장가오리를 겨냥한 이 사건이 돌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위안훙빙은 지난 19일 에포크타임스에 이것이 의도된 사건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은 틀림없이 누군가가 사주한 것”이라며 “앞서 장쩌민 시대의 일부 문제를 비판하는 데 대해 장가오리가 강하게 반대했고, 이것이 시진핑을 화나게 했다. 그래서 이 스캔들이 공개됐다. 공개한 것은 그(장가오리)에 대한 일종의 경고다”라고 했다.

지난 16일 중공 당국이 6중전회 결의 전문을 공개할 때 시진핑이 서명한 설명도 함께 공개했다. 설명문에 따르면 시진핑이 결의 초안 작성조 조장을 맡고 왕후닝(王湖寧) 중앙정책연구실 주임과 자오러지(趙樂際)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부조장을 맡았다. 또 정치국 상무위원의 지도하에 ‘당내 일부 원로 동지’를 포함한 당내 인사의 의견을 두루 수렴한 뒤 결의 초안 547곳을 수정했고, 전체회의에 상정하기 전 상무위원들이 3차례, 정치국이 2차례 회의를 열어 심의했다.

위안훙빙은 이 ‘원로 동지’들이 바로 중공의 전직 고위 관료, 즉 정치국원 이상의 퇴직한 관료들이라고 했다.

그는 중공 내부 인사의 말을 인용해 장쩌민에 대한 시진핑의 부정적인 시각을 전했다.

“중공 내 양심적인 인사에 따르면 시진핑은 처음에 장쩌민 시절의 중대한 정치적 실수, 즉 정치노선 문제로 전면적인 부패가 초래됐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하려 했다. 또 장쩌민이 자본가의 입당을 허용한 규정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려 했다. 그(시진핑)는 이런 규정이 공산당의 가장 기본적인 정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장쩌민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의 일부 공로는 인정하려 했을 것”이라며 “장쩌민의 가장 큰 정치적 과오는 자본가의 입당을 허용하고 공산당의 기본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당의 지도력이 느슨해져 부패가 경악할 정도로 만연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2차 역사결의 때 화궈펑(華國鋒)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처럼 3차 결의 때 장쩌민 집권 시기의 과오를 비판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시진핑은) 세 번째 역사결의에서 장쩌민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예정이었고, 당시 리잔수(栗戰書·전인대 상무위원장)에게 (비판 내용을) 상무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장가오리가 앞장서서 반대했다. 다른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주룽지도 반대했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시진핑을 지지했다.”

그는 장쩌민에게 부패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는 시진핑의 노력은 ‘중대한 좌절’을 겪은 게 분명하다고 했다.

시진핑이 장쩌민을 공개 비판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위안훙빙은 이렇게 정리했다.

“이른바 ‘시진핑의 신시대’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구(舊)시대가 있어야 한다. 장쩌민의 구시대에 대한 부정 없이는 시진핑의 신시대는 모래 위의 성처럼 기초가 허약해진다.”

위안훙빙은 지난 18일 공산당 내부 지인에게서 이 메시지를 받은 뒤에야 이번 투쟁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했다. 즉 19기 6중전회가 끝났다고 해서 당내 권력투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치열한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위안훙빙은 공산당 내부 인사를 인용해 “시진핑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장가오리)가 이 문제를 제기한 만큼 중공 20차 당대회 전에 장쩌민을 공개 비판할지를 놓고 극히 혹독한 당내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

中 매체 둬웨이, 위안훙빙의 분석 간접적 시인

필자는 위안훙빙의 폭로 내용의 진위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친공(親共) 성향의 둬웨이왕(多維網)은 6중전회 결의가 발표된 후 이례적으로 분석기사를 통해  결의에서 중공 당사의 3단계인 이른바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신시대’를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며 심지어 대상을 지명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례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둬웨이홍이 위안홍빙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지난 17일 둬웨이왕은 ‘중국공산당 제3차 역사결의에 담긴, 대상을 밝히지 않은 비판’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중공 세 번째 역사결의는 “개혁개방 이래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 역대 지도자들의 업적을 충분히 인정했지만 시진핑 시대를 평가하면서 개혁개방 이래의 적폐와 관련해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비판했다”고 했다.

이 글은 이 결의 중 시진핑과 관련된 부분에서 개혁개방 시기를 언급하면서 먼저 개혁개방 후의 ‘중대한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동시에 “공산당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가운데 한때 느슨해져 당내에 부패 현상이 만연하고, 정치 생태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당-군중 관계와 간부-군중 관계가 손상되고, 당의 창의력·결속력·전투력이 약화돼 당이 국정을 다스림에 있어 중대한 시련에 직면했다”고 비판한 점을 예로 들었다.

둬웨이는 이번 결의에서 18차 당대회 전까지의 개혁개방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여러 면에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 점과 시진핑 시대에 이를 바꿀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의 글에는 “한때 당에 대한 관리가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당을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가 서로 얽히고, 부정부패 정도가 경악할 정도가 됐다”는 등의 시진핑의 7가지 비판도 실렸다.

둬웨이는 결의에서 ‘한때’라는 모호한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는 18차 당대회 이래의 부패 척결의 방향과 맞아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또 결의는 군(軍) 문제와 관련해 “한때 인민군대에 대한 당 지도가 약화한 문제가 심각했다”며 궈보슝, 쉬차이허우, 팡펑후이, 장양 등 군 내 관료들의 부패 문제를 비판했다.

특히 중공군 내의 최대 부패 관료인 궈보슝과 쉬차이허우는 모두 장쩌민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후진타오는 자신이 군권을 쥐고 있던 시기에 장쩌민의 명령을 따르는 이 두 사람에 의해 허수아비가 됐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후진타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동시에 그들의 ‘보스’인 장쩌민에 대한 간접 타격도 된다.

중공 지도자들의 행보는 모두 당내 권력 투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진핑은 ‘빈 손’ 평가를 받는 바이든 대통령과의 미중 화상 정상회담도 자신의 권력 행보에 이용했다.

그는 미중 정상회담과 세 번째 역사결의와 시기적으로 비슷하게 열리도록 배치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분위기를 연출해 내부 선전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고위층의 추악한 사생활을 폭로해 신변이상설이 제기됐던 펑솨이는 2주만에 다시 등장해 건재함을 드러냈다.

논란이 됐던 폭로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었다’며 부인하는 이메일을 발표하는 것으로 싱겁게 수습했다. ‘정권의 비호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느냐’는 지적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