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共 치하의 슬픔…계속되는 중국인 ‘망명’ 행렬

가오톈윈
2019년 07월 1일 오후 4:42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19

달은 고향 달이 더 밝다지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중국 국민들이 산과 고개를 넘고 바다를 건너 고향과 작별하고 먼 곳으로 떠났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망명자들은 그들의 조국이 적색(紅色·공산주의와 혁명을 비유) 통치하의 기이한 흑색(黑色·비관적이고 답답하고 침통함을 비유) 모습이지만, 그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바다 건너 있는 자유

1990년 2월 말의 어느 날 밤, 우런화(吳仁華)가 주하이(珠海)에서 헤엄쳐 마카오로 건너갔다. 섭씨 7도의 기온에서 파도와 4시간 동안 싸운 그가 육지에 다다랐을 때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그 후 홍콩의 참새작전(黃雀行動·반체제 인사 구출작전) 멤버들과 연락이 닿은 그는 어선 지하 창고에 몸을 숨겨 홍콩으로 넘어갔다. 같은 해 7월, 베이징 정법대 전임강사였던 그는 정치적 난민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우런화가 망명을 택한 이유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왕쥔타오(王軍濤)와 천쯔밍(陳子明) 등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1989년 6월 3일 밤, 그는 중공군의 민간인 학살을 직접 목격했다. 다음 날인 4일 새벽, 그는 학생 시신 앞에서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비분에 차서 맹세했다. 29년 동안 ‘톈안먼 사건’ 희생자와 계엄군 관련 자료를 모으는 데 전념해온 그는 ‘톈안먼 사건’ 역사 연구의 권위자가 됐다.

일찍이 우런화가 망명하기 전인 1950~80년대에도 100만 명이 넘는 중국인이 기근과 가난, 정치적 박해 등을 피해 걸어서, 혹은 헤엄치거나 배를 타고 홍콩으로 밀입국했다. 이는 냉전시대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에 걸친 집단 망명 사건으로, 역사는 이를 ‘대도항(大逃港·많은 사람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홍콩으로 도망간 사건)’이라 한다.

홍콩으로 밀입국한 자는 대부분 농민이었으나, 일부 도시 주민, 학생, 지식 청년, 노동자, 심지어 군인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밀입국하는 과정에서 물에 빠져 죽고 상어에 물려 죽고 산에서 떨어져 죽고 병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1967년 1월 15일 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중앙음악학원 초대 원장인 마쓰충(馬思聰) 씨 일가족 네 명도 농민으로 변장해 5만 홍콩달러(약 742만 원)를 주고 홍콩으로 밀입국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쓰충은 문화혁명 기간의 모욕을 견디지 못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 중국에 남아있던 친척과 친구 수십 명이 연좌됐다. 그의 둘째 형은 투신자살했으며, 그의 장모와 조카딸 및 조리사는 박해를 받다 죽었다. 중국 당국이 그에게 씌운 죄명은 ‘반역죄’였다.

마쓰충은 ‘나는 왜 중국에서 도망쳤나? ‘문화대혁명’의 끔찍한 진실에 대해’라는 제하의 글에서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파멸시키고 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 일어난 일들은 나를 완전히 절망에 빠뜨렸고, 나와 내 가족을 도망자로 만들어 사방을 떠도는 ‘배고픈 유령’이 되게 했다”고 했다.

1962년 5월, 중국의 도항난민(逃港难難民·홍콩으로 망명한 난민)들이 홍콩 사무실 직원들 앞에서 피난 경위와 신분을 진술하고 있다. | AFP/Getty Images
1962년 5월, 중국의 도항난민들이 송환을 앞두고 점심을 먹고 있다. | AFP/Getty Images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망명자들 ‌‌

2012년 4월 6일, 왕단(王丹), 후핑(胡平), 왕쥔타오, 우얼카이시(吾爾開希), 우런화, 샹샤오지(項小吉) 등, 해외로 망명한 ‘톈안먼 학생운동’ 주역들은 ‘우리는 중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며, 이를 중국 당국에 공개적으로 호소한다’는 제하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1989년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가 해외로 망명한 중국인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여권 연장이 거부되거나 여권이 아예 정지되거나 입국을 거부당했다면서 “귀국할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호소했다.

여류작가 모리화(莫莉花)는 원래 후난(湖南) 사오양(邵陽) 사범전문대학 교수였으나, ‘톈안먼 사태’ 때 학생운동을 지지했다가 ‘반(反)혁명선전선동죄’라는 죄명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1992년 홍콩으로 망명한 뒤 스웨덴에 체류하고 있다. 2009년, 그녀의 남편 푸쩡민(傅正明)은 인터뷰에서, 그들 부부는 한 번도 중국에 가지 않았다고 밝히며 “물론 우리도 우리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다른 친구나 사람들이 중국으로 돌아간 뒤 국가안전부에 미행당하거나 심문당하는 상황을 많이 봤다. 우리는 매우 실망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존엄성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진정으로 진보하고 자유로워져야 우리가 존엄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불가능한 일을 해낸 천광청

2012년 4월 22일 깊은 밤, 가택연금을 당한 시각장애 변호사 천광청(陳光誠)이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그는 홀로 담장 8개를 넘고 울퉁불퉁한 밭고랑 10여 개를 건너서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을 만났다. 그 후 그는 여러 네티즌의 도움을 받아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경찰 수백 명과 촌락위원회의 감시를 따돌리고 4월 26일 마침내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들어갔다. 이어 5월 19일, 천광청(陳光誠) 일가족도 미국으로 떠났다.

산둥(山東)성 린이(臨沂)시 이난(沂南)현 솽허우(雙堠)진 둥스구(東師古)촌 출신의 천광청은 독학으로 습득한 법률 지식으로 현지 농민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섰으며, ‘맨발의 변호사’로 유명했다. 2005년, 천광청은 린이시가 강제로 산아제한을 하고 낙태를 불법으로 시행한 사실을 폭로했다가 구타와 구금을 당했다. 2006년 4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2010년 9월 출소한 뒤에도 가택연금을 당했다.

현지 정부는 천광청 문제가 ‘적대적 모순’에 속한다고 했다. 천광천의 집에는 CCTV, 휴대전화 수신 차단기가 설치됐고, 그와 그의 아내에게는 외출 금지 조치가 떨어졌다. 또한 수십 명이 그의 집 주변을 24시간 교대로 지켰고, 외부인 출입도 금지됐다. 생활용품은 그의 어머니만이 가져다줄 수 있었고, 이웃들이 도와주면 그 즉시 경고나 위협을 받았다. 이 기간에 그를 찾아온 국내외 인사들도 여러 차례 저지, 구타, 모욕, 약탈을 당했고 강제송환되기도 했다.

2015년 6월, 천광청은 홍콩 시민들에게 “국민을 노예로 삼는 정권은 없는 것이 낫다. 우리는 이미 중국 공산당에 여러 해 동안 속아왔고 그들의 속임수를 직접 경험했다. 그들에 대한 믿음의 결과는 언제나 우리를 우롱했다. 홍콩 시민과 각성한 본토 민중들이 손잡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2016년 10월, 25살의 후베이(湖北) 여성 장롄쟈오(蒋炼娇)가 중국에서 탈출했다. 유년시절과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까지 그녀는 줄곧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한 장롄쟈오는 9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베이징 톈안먼으로 상팡(上訪·하급기관의 민원 처리에 불복해 상급기관에 직접 민원을 내는 행위)을 하러 갔다가 경찰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 후, 그녀의 부모는 강제로 노동교육을 받았고, 그녀와 그녀의 오빠, 여동생은 감시를 받으며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다. 그녀는 “10년 넘게 우리 집은 계속 괴롭힘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부모님도 자주 세뇌반(洗腦班)에 끌려가 박해를 받았어요. 경찰은 최소 5번 이상 우리 부모님을 동시에 잡아갔고, 그때마다 매우 오랫동안 갇혀 계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며 “저는 왜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을까요? 제가 외국인이었다면 저도 이런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 텐데요”라고 했다. 그녀는 또한 “중국에선 아주 사소한 일로도 잡혀갈 수 있어요. <전법륜> 책 한 권을 소지하거나, 다른 수련자 집에 가거나, 다른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는 전단 한 장을 주거나, 인터넷 담장을 우회하는 프로그램 하나 혹은 USB 메모리나 MP3 플레이어 하나를 소지해도 잡혀갈 수 있단 말이에요. 더 심한 경우도 있어요. 만약 당신이 길에서 다른 사람에게 ‘파룬궁을 아느냐’고 했다면 이런 말 한 마디로도 잡혀갈 수 있고 정신병원에 갇힐 수도 있어요. 몇 년 동안 판결을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큰 나라가 이렇게 사소하고 정상적인 일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고 있어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장롄쟈오는 언젠가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두려움에 떨지 않고 기쁘게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유엔 앞의 시위자들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는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집이 강제 철거된 팡민(訪民·상팡을 한 사람)들로, 중국 내에서 궁지에 몰리자 외국에서 중국 공산당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상하이에서 온 천다이리(陳黛莉)는 집이 2003년 강제 철거됐는데, 그 집은 그녀의 시할아버지가 남겨준 것이었다. 그녀는 징안(靜安)구 토지관리국과 공안분국을 고소했지만 패소했고 항소도 기각됐다. 이 때문에 팡민이 된 그녀는 체포와 구금을 당했고, 감시를 받았다.

그녀는 “중국에서 상팡을 한 후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여기(미국)서는 먹는 것도 깨끗하고 공기도 깨끗하고 인권과 민주와 자유도 있네요”라고 했다.

차이원쥔(蔡文君)도 집이 강제철거당한 피해자로, 그녀는 상팡을 했다가 직장을 잃고 노동교육을 두 차례나 받았다. 또한 심한 구타와 감시에 시달렸으며, 그녀의 가족도 괴롭힘을 당했다. 그녀는 “돌아가라, 너의 일은 국내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등의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녀는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면 중국을 떠나지도 않았다. 여기서 나는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우리 집에 무슨 짓을 했는지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고, 중국 공산당의 악행을 폭로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고 했다.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항의하는 중국 팡민 차이원쥔, 천따이리, 천쉬우핑(陳秀平)과 바이제민(白節敏) 등. | 팡민 제공

대만에 고마움을 느끼는 황옌

2018년 5월 29일 저녁, 중국 인권운동가 황옌(黃燕)은 대만 타오위안(桃園)공항을 경유하면서 대만 입국을 요청했다. 대만은 인도적 차원에서 황옌에게 3개월 체류를 허가했다. 황옌은 기자들에게 대만 출입국관리소 사람들이 매우 잘 대해줬다며 “이것은 내가 10년 넘게 느껴본 적이 없는 따뜻함이었다”고 했다.

황옌은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2003년부터 중국 공산당에 여러 차례 체포당했고, 법 집행 요원들의 옥중 구타로 유산된 적도 있다. 그 후, 그녀는 암에 걸렸는데도 병보석을 받지 못했다. 2016년 말, 황옌은 홍콩으로 도피한 뒤 태국과 인도네시아 두 곳으로 옮겼지만, 그 기간 내내 여전히 심문과 구류에 시달리며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2019년 1월, 미국의 정치적 보호를 받은 황옌은 기자들에게 망명한 많은 중국인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밝히며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실종되고 있을지 모른다. 중국에선 거의 매분 매초, 누군가가 실종되거나 납치된다”고 했다.

2019년 1월 24일 저녁, 황옌은 대만 정부와 미국의 협조 아래,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 중국 인권에 관심 있는 대만 연맹

결론

중국공산당 치하의 중국인의 망명길에는 끝없는 고통과 슬픔이 응집돼 있다. 피눈물 나는 시간이었지만 끝까지 버텨낸 사람도 있고, 불행히도 중도에 쓰러져 자유의 땅을 밟지 못한 사람도 있다. 미국과 캐나다 등 서방국가에서는 중국에서 온 정치적 망명 신청자 수가 항상 가장 많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멀리 있는 한 그들의 망명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망명자들의 폭로와 절규는 인류 문명의 역사책에 조금씩 기록돼 중국 공산당의 양심을 고문할 것이다.
참고자료:

치셴위(齊先予)의 <천광청전: 탈출과 7년간 갇혀 있었던 근본 원인>, <신기원주간(新紀元周刊)>의 2012년 5월 10일 자 기사

스핑(施萍)의 <대륙에서 뉴욕까지, 중국 공산당의 박해에 대한 중국 팡민의 항의>, 본보 2016년 7월 29일 자 기사

장롄쟈오의 <90년대 소녀의 자술>, 본보 2016년 10월 27일 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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